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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천 Sep 18. 2021

베르테르의 슬픈 얼굴

“베르테르 현상”이라는 용어가 생겨날 만큼 당대 젊은이들에게 뿐만 아니라 현대인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74)은 제목이 조금 묘하다.     


<덴마크 왕자 햄릿의 비극> 또는 <세일즈맨의 죽음> 등 비극의 제목에는 대개 “~~의 비극”이나 “~~의 죽음”이라는 말이 들어가는데, 괴테는 그 자리에 “슬픔”을 넣었다. 그리고 주인공의 이름 앞에 “젊은”이라는 형용사를 붙였다.     


작품을 읽지 않은 사람이 제목을 보고 작품 내용을 유추한다면, 젊은이였기에 겪을 수밖에 없었던 슬픔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이라고 짐작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짐작은 그리 틀린 것이 아니다.     


베르테르는 무엇이 그리도 슬펐을까.     


그의 슬픔의 근원에는 개인의 힘으로 벗어나기 힘든 당대의 신분제도와 경제체제가 있다.      


신분제가 아직 엄격하게 남아 있던 한편 근대국가의 체제를 갖추기 시작한 18세기 독일에서는 근대 국가의 운영에 수반되는 실무를 처리할 행정인력이 필요하자 중간 계층에게 대학 교육을 시켜 이 인력을 충원한다. 그리하여 소수이지만 대학 교육의 혜택을 받은 중간 계층의 젊은이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때맞추어 확산된 계몽주의와 낭만주의의 영향으로 관습을 무조건 따르던 과거에서 벗어나 개인의 능력과 열정을 중요시하는 풍조가 급속히 퍼지자, 대학 교육을 받은 베르테르와 같은 젊은이들의 포부는 한껏 부풀었다. 이 세상에 내 꿈과 능력을 펼쳐 보이리라!     


일찍이 아버지를 여읜 베르테르도 중간 계층에 속한 덕에 대학에 다니며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베르테르가 남달랐던 점은 그리스어로 호메로스를 호메로스를 읽을 만큼의 지식을 갖추었으면서도 서민을 따스하게 바라보는 눈을 잃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베르테르의 온화한 성품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귀족이 아니라 중간 계층이라는 자신의 신분을 철저히 자각하고 있었다는 표시이기도 했다.     


그에게 주어진 이 어중간한 위치에서 그의 비극의 씨앗이 싹트고 있었다. 최고의 교육을 받았으나 거기서 기른 능력을 발휘할 마땅한 자리가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당대 독일 사회는 그런 자리를 제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베르테르 같은 능력 있는 중간 계층 젊은이에게 주어진 길은 귀족에게 봉사하는 길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수십 개의 작은 공국으로 나뉘어진 독일에서 한 지역을 다스리는 영주를 행정적으로 뒷받침하는 자리, 요즘으로 치면 공무원이다.     


당시 공무원은 공정한 선발시험을 통해 뽑는 것이 아니라 귀족의 추천에 의해 선발되었고, 일단 선발된 뒤에도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려면 후원자의 눈에 들어야 할 뿐만 아니라, 잠재적 경쟁자를 억누르려는 상관의 치졸한 압력을 견뎌내야 했다.      


베르테르는 그의 능력을 알아본 귀족의 도움으로 하급관리 자리를 얻기는 했지만, 그런 갑갑한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을 죽이고 살아가기에는 너무 젊었고 그의 가슴은 너무 뜨거웠다. 차라리 고등교육을 받지 못했더라면 시골 농부들처럼 큰 불만없이 살아갔을 것을, 교육을 받고 능력을 기른 탓에 베르테르는 신분제의 제약을, 그리고 아직 발달하지 못한 당대 경제 체제의 제약을 더욱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능력과 열정이 있으나 그것을 펼칠 수 없는 자의 울분과 비애, 그것이 베르테르의 슬픔이었다.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 이론에 비춰보자면 자아실현 욕구가 좌절된 자의 슬픔이었다. 그리고 로테에 대한 베르테르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그 좌절에서 비롯된 퇴행이었다.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에서는 한물 간 이론으로 취급받지만 사회학과 경영학에서는 아직도 널리 활용되는 매슬로우의 이론은 인간의 심리적 또는 정신적 성숙 단계를 5단계로 구분한다.     


1단계 생리적 욕구 

2단계 안전과 인정 욕구

3단계 사랑과 소속감에 대한 욕구

4단계 존경 욕구

5단계 자아실현 또는 자기초월 욕구     


1~4단계는 부족한 것을 채우는 단계이기에 결핍 욕구라고도 부른다. 하지만 5단계는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는 욕구이기 때문에 존재 욕구라고 부른다. 자신의 잠재력을 현실에서 실현하려는 욕구,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욕구, 창의력을 발휘하려는 욕구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베르테르는 높은 학식에도 불구하고 따스한 마음과 평등한 정신을 가졌기에 주변의 시골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그의 능력을 알아주는 귀족도 있었다.     


그러나 뛰어난 재능과 열정을 펼칠 무대를 찾지 못하자 그는 비극을 예감하면서도 로테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모든 것을 걸게 된다. 매슬로우의 이론에 따르자면 5단계인 존재 욕구가 좌절되자 3단계인 사랑의 욕구로 퇴행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베르테르를 비난할 수만은 없다. 생존이 최우선인 시대나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란 세대에게는 5단계는 커녕 2, 3단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만으로도 필생의 목표가 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의식주 해결이 별 문제가 아닌 시대가 되면, 그 다음 단계의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이런 좌절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어려웠던 옛날이나 더 어려운 여건에 있는 사람을 거론하며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에 만족하라고 충고한다면 일시적인 반성은 이끌어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진정한 해결책은 되기 어렵다.     


베르테르의 슬픔은 능력과 열정을 발휘할 자리를 찾지 못한 시대적 불운으로 인한 슬픔이다. 대학 진학률이 OECD 국가 중 최고이지만 그런 젊은이들이 졸업 후 열정을 발휘할 자리는 급속히 줄어가는 시대, 중산층이 허물어지고 계층이동의 사다리가 치워지고 있는 이 시대 젊은이들의 얼굴에 베르테르의 슬픈 표정이 겹쳐 보이는 것은 나만의 착각은 아닐 것이다.     


둥글게 둥글게 살아가는 것이 세상을 사는 지혜라고 할 수도 있지만 잘난 밥그릇 하나 지키기 위해 타협할 때면 젊은 날의 열정이 어디로 갔는지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열정을 불사를 기회 조차 갖지 못했던 베르테르를 떠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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