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천 Sep 17. 2021

지킬과 하이드

1.

지킬은 런던의 잘 나가는 의사였다. 점잖고 중후한 매력의 중년 신사인 그는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을 즐기는 사교계의 인기남이기도 했다. 결혼하지 않은 그를 흠모하는 여성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는 그런 여성들의 구애를 점잖게 거절하고는 했다. 그에게는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내면에는 하이드파크의 으슥한 어둠을 찾아 힘없는 자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는 또다른 자아가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내면에 또다른 자아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은 오래 전이었다. 어릴 때는 그 또다른 자아도 힘이 세지 않아 큰 문제가 없었지만 지킬이 성장하면서 그 자아도 같이 성장하여 점점 힘이 세어진다.  

   

지킬은 또다른 자아가 자신을 집어삼킬 것이 두려워 의학을 공부하여 그 자아를 억제하는 약을 개발한다. 그리하여 그것이 비집고 나오면 약을 먹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것의 힘은 강해지고, 마침내 무고한 사람을 마구 때려 살인까지 저지르게 된다. 그 전에는 약의 힘을 빌려 간신히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었으나 약의 재료를 더 이상 구할 수 없게 되자, 또다른 자아에 점령당한 채 살아가게 될 것이 두려워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2.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지킬과 하이드>(1886)는 다중인격을 본격적으로 다룬 최초의 소설이다. 원작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도 한 번쯤은 들어본 이중인격 또는 다중인격의 대명사 지킬과 하이드. 근래에 나온 뮤지컬에서는 슬픈 로맨스의 주인공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소설에서는 지킬이 하이드로부터 주로 협박 받는 피해자인 것으로 그려져 있지만, 그것은 당대 독자의 비난를 피하기 위한 스티븐슨의 장치였을 가능성이 높다. 하이드라는 존재는 지킬이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언제고 기회만 되면 충족될 기회를 노리며 그의 무의식 속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폭력적인 욕망의 외화라 할 수 있다. <지킬과 하이드>의 출간과 프로이트가 무의식에 대한 이론을 탐구하기 시작한 시기가 겹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인류의 정신사가 내딛는 커다란 한 걸음을 예민하게 감지한 지성인들 사이의 동조 현상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정도 차이는 있지만 공개할 수 없는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다. 표출하면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기에 억제할 뿐이다. 만일 일탈적인 행동을 감출 수만 있다면, 나의 행동을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감출 수만 있다면 욕망을 억제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 질문에 대해 일찍이 플라톤은 회의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그가 쓴 “기게스의 반지”라는 우화에 나온 기게스라는 양치기 이야기다.      


기게스가 어느 날 들에 나갔다가 어느 거인의 시체를 발견하는데 그 거인이 끼고 있는 반지를 보자 탐이 나서 빼낸다. 그런데 그 반지를 끼면 몸이 안 보이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 능력을 이용하여 왕비를 유혹하고, 나아가 왕마저 죽이고는 마침내 왕위에 오른다. 몸을 감추어주는 반지와 욕망의 발현이라는 모티브는 “반지의 제왕”에 다시 등장한다.      


플라톤이 보기에 사람은 타인의 시선이 없으면 극히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존재다.      


그런데 억제되었던 욕망은 왜 늘 부정적인 모습으로 나타날까. 그것은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며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일까. 그러나 비난 받을 소지가 있는 욕망은 억제해야 하고, 억제하다 보니 왜곡되고, 왜곡되다 보니 그것이 어떤 계기로 드러날 때는 일그러진 모습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욕망을 아름답게 드러내는 방법은 정녕 없는 것일까.     


3.

<지킬과 하이드>가 출간된 1880년대 영국은 빅토리아 여왕이 지배하던 시기다. 60년 이상 다스린 이 여왕의 이름을 따서 빅토리아조라고 부르는데, 이 시기의 특징 중 하나는 성적 욕망에 대해 상당히 이분법적인 시각을 가졌다는 것이다.     


이 시기의 여자는 ‘가정의 천사’와 ‘거리의 요부’라는 두 타입으로 나뉘었다. 양가집 규수와 기혼 부인은 가정을 지키는 천사같은 존재여야 하며 그 천사는 당연히 성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라야 했다. 천사의 잠자리는 오직 아이를 낳기 위한 수단에 국한되었다.     


그렇다고 하여 그 시대 남자들의 욕망이 다른 시대보다 덜했을 리는 없으니 많은 남자들이 가정에서 채워지지 않는 (또는 채울 수 없는!) 욕망을 ‘거리의 요부,’ 즉 화류계의 여자에게서 채웠다.     


여자의 일생이라는 면에서 볼 때, 비슷한 집안 출신 남자와 결혼하면 비교적 무난하게 사는 것이 가능했던 양가집 규수와 달리 하층민 여성들에게는 대략 세 가지 선택이 있었다. 하나는 비슷한 계층의 남자에게 시집가는 것, 또 하나는 산업화로 급격히 늘어나던 공장에 취직하여 형편없이 낮은 급료를 받으며 혹사당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거리에서 몸을 파는 것이었다.      


물론 다른 일을 하다가 여의치 않으면 거리의 여자가 되는 일도 많았다. 일하던 귀족 집이 몰락하거나 (토지에서 나오는 수입에만 의존하다가 산업혁명 이후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여 몰락한 귀족이 매우 많았다), 공장에서 일하다가 다치거나 몸이 약해져 그만두게 되면 거리의 여자가 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레 미제라블>에서 코제트의 엄마 판틴이 거치는 경로가 바로 이에 해당되는데, 프랑스 뿐만 아니라 영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당시 남자들이 여자를 보는 시각은 성적 욕망이 결여된 ‘가정의 천사’와 성적 욕망만이 존재하는 ‘거리의 요부’로 나뉘었고, 대부분의 남자들은 여성이 성적 욕망을 지닌 천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여자를 이분법적으로 본다는 것은 곧 남자 자신도 이분법적인 존재로 본다는 의미다. 매너 좋은 훈남 의사 지킬과 폭력적인 하이드가 한 몸에 공존한다는 설정은 바로 이 시대 남성의 양가적이고 분열된 자아의식에 대한 비유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여자에게뿐만 아니라 남자에게도 불행한 일이었다. 인격 대 인격, 사람 대 사람으로서의 성관계가 아니라 아이를 낳기 위한 도구로서, 또는 쾌락을 채우는 수단으로서의 성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성적 욕망을 지닌 천사는 형용모순일까? 남자도 욕망을 지닌 천사가 될 수 없을까?     


사실 인간 자체가 모순된 존재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여 욕망을 감추고 억제하기 시작하면서 그러한 모순을 울타리에 가두고 살아간다. 그러다가 술의 힘이나 어떤 계기로 울타리가 무너지면 욕망은 폭발적으로 뛰쳐나온다.     


그렇다면 폭발할 때까지 억제하지 말고 다른 경로로 조금씩 표현하거나, 자동차의 엔진처럼 생산적인 방향으로 폭발시킬 수는 없을까.     


4.

남자들이 이상적인 신부감으로 꼽는 여자는 주방의 천사, 침실의 요부라는 고전적인 유머가 있었다. 낮에는 순진하고 착한 아내, 밤에는 잠자리에 적극적인 요부. 모순된 요구인 듯하지만 남자의 내면에 있는 욕망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이해하지 못할 일도 아닌 것 같다.     


입장을 바꾸어 여자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신랑감에 대해서도 비슷한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낮에는 성실하고 능력 있고 매너 좋은 남자이지만 밤에는 소위 짐승남으로 변신하는 남자라면 마다할 여자는 별로 없을 듯하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라는 로맨스 소설이 여성들 (특히 중년 여성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 이유는 그런 남자에 대한 여자들의 환타지를 충족시켜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지킬은 자기 안의 짐승같은 하이드를 억지로 가두려고 하다가 불행하게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잘 달래어 그의 폭력성이 다른 방향으로 표출되게끔 유도했더라면, 매너 좋고 부드러운 신사 지킬과 남성적이고 호쾌한 하이드가 공존하는 대단히 매력적인 남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류의 정신사의 궤적을 볼 때 그런 남자는 환타지의 영역에서만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아직까지는.     

매거진의 이전글 계단을 오르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