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친의 유언장을 처음 본 것은 돌아가시기 오륙 년쯤 전이었다. 이제 나도 알고 있으라며 보여주신 유언장에 나는 여러 번 놀랐다. 우선 갑부도 아니고 건강에 별다른 문제도 없던 선친이 유언장을 미리 작성하신 것에 놀랐고, 해가 바뀔 때마다 갱신하고 계신다는 것에 또 한 번 놀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유언장의 내용에 놀랐다. 어릴 때부터 키워온 조카에게도 나와 똑같이 유산을 배분해주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카. . .
부모님은 조카들을 여럿 뒷바라지했다. 이촌향도의 물결이 전국을 휩쓸던 60년대 말 70년대 초, 서울 변두리에 자리잡고 있던 부모님은 자식들을 데리고 있어 달라는 친척들의 청을 거절하지 못했다. 결혼 후 오랫 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았던 어머니는 조카를 자식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그렇게 시작된 조카들 뒷바라지는 내가 태어난 후에도 계속 되었다. 학교에 다니는 조카의 교복과 공장에 다니는 조카의 작업복을 밤에 빨아 연탄불에 말려 새벽에 다림질하여 입혀 보내는 일을 어머니는 무수히 반복했다. 나는 어렸기에 그 시절의 기억이 단편적으로만 남아 있지만 지금도 종종 찾아오는 사촌 형님이 아직도 그 시절을 얘기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짐작하고 있다.
그렇게 장기간 데리고 있던 조카만 셋이고, 몇 달씩 머물던 조카들까지 합하면 십여 명은 될 것이다. 선친도 어머니도 참 무던한 분들이었다. 다른 조카들은 그렇게 학교 다니고 취직하고 결혼까지 했으나, 태어난 후 얼마 되지 않아 데려온 처조카 하나는 결혼을 하지 않고 부모님과 계속 같이 살았다. 선친의 처남댁, 그러니까 나의 외숙모가 아이를 낳고 몸이 극도로 쇠약해지자 남매간 정이 두터웠던 어머니가 얼마간 키워준다고 데려왔다가 정이 붙어 그냥 데리고 살았다. 이미 구남매를 키우고 있던 외숙와 숙모는 오히려 고마워했다.
나는 여동생으로 여기지만 선친에게는 처조카다. 선친의 유언장을 보고 내가 놀란 이유는 이 조카에게도 나와 똑같이 유산을 나누어준다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의 솔직한 심정은, 약간의 서운함이었다.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랐지만 그래도 나는 외아들인데 얼마 되지 않는 재산이긴 하지만 내게 조금 더 주셔야 하지 않나. . .
하지만 다음 순간, 깊은 반성과 함께 선친에 대한 존경심이 일었다. 선친은 이 아이를 친딸로 여기고 계셨구나. 그리고 진정으로 남녀평등을 실천하는 분이었구나. 아들 딸 간에 유산 분배에 차별을 두는 집 얘기를 심심치 않게 들었던 나로서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선친의 생각이 오히려 더 진보적이라고 느낀 순간이었다.
그리고 평소 당신의 모습이 겹쳐졌다. 명절상은 낭비가 없도록 먹을 만큼만 차리라고 강조하시던 당신, 부엌 일은 어머니가 전담하셨지만 그밖에 소소한 집안 일은 서슴없이 먼저 움직이시던 당신. . . 선친이 돌아가시기까지 유언의 내용이 때로 약간 수정되기는 했지만 유산 배분에 관한 사항은 변함이 없었다.
선친이 가시고 몇 년 후 유산으로 받은 작은 땅을 처분했을 때, 나는 유언장에 적힌 대로 정확히 나누어 동생에게 주었다.
선친의 기일을 맞아 추모공원에 가 봉안실에 있는 가족사진을 보았다. 사진 속의 선친은 여전히 빙그레 웃고 계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