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게임>을 보며 영어 또는 다른 언어로 옮기기 쉽지 않겠다는 표현이 몇 개 눈에 띄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눈에 띈 것은 ‘깍두기’다. 사전에는 ‘어느 쪽에도 끼지 못하는 사람이나 그런 신세’(고려대 한국어대사전)라고 다소 건조하게 풀이되어 있지만, 실제 놀이 중 사용되는 방식은 그보다는 온정적이어서, 양쪽 모두에게서 배제된 외톨이가 아니라 덤으로 포함된 존재였다.
내가 어릴 때 동네에서는 나이가 어리거나 키가 작거나 놀이 규칙을 잘 몰라 참여하기 어려운 아이도 끼워주기 위해, 정규 멤버 이외에 추가 멤버로 인정해주는 방식이었다. 가령 놀이터에 모인 아이가 열 한 명이라면 다섯 씩 팀을 나누고 남는 한 명은 깍두기로 인정해 한 쪽에 끼워 주는 것이다. 물론 상대 팀의 동의가 있어야 했지만, 상대 팀이 동의하지 않은 적은 내 기억에 없었다.
이 깍두기를 영어로 어떻게 옮겼나 궁금하여 확인해 보니 ‘the weakest link’, 가장 약한 고리라고 옮겼다. 아주 틀린 번역은 아니지만 약자까지 모두 게임에 포함시키기 위한 장치라는 느낌은 빠져 있다. 번역의 어쩔 수 없는 한계다.
약자도 참여할 수 있게 하는 배려. 놀이터와 현실의 가장 큰 차이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릴 적 놀던 놀이터에서는 힘이 약한 아이도, 키가 작은 아이도, 나이가 어린 아이도 역할을 부여받았다.
또한 놀이가 끝나면 모든 것이 리셋되고 그날의 승패가 다음 날의 놀이에 영향을 미치는 일이 없었다. 이기든 지든 놀이가 끝나면 모든 것이 리셋된다.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놀 때는 더욱 놀이에 집중할 수 있었고, 승패에 지나치게 매달리지 않으면서 게임의 재미를 만끽할 수 있었다. 한 게임이 끝나면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 . 엄마가 밥 먹으라고 부르지만 않는다면 무한정 놀 수 있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승자와 패자가 다시 만나 같은 게임을 또 벌이는 일은 드물다. 게임이 끝나면 승자와 패자는 다른 세계로 나뉘기 때문이다.
놀이터에서도 강한 아이가 이기는 것은 분명하다. 강한 아이를 중심으로 패거리가 형성되기도 한다. 하지만 게임의 룰 자체는 공정하면서도 약자를 배려하는 장치가 있다. 그리고 어제의 승자가 오늘도 승자의 위치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같은 위치에서 다시 시작한다. 그래서 다음 날이면 같은 놀이터에 모여 다 같이 놀았다. 그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그 놀이터만으로도 어린 시절은 충분히 행복했다.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초등학생부터 학교 수업을 마치자마자 태권도, 미술, 영어, 수학 등 학원에 가기 바쁘다. 그러니 어쩌다가 놀이터에 나온 아이들은 같이 놀 아이들이 없어 외톨이가 된다. 이 아이들은 깍두기를 어디에서 배울까. 시험 성적에 따라 합격과 불합격을 가르는 것만이 공정이 아니고, 약자를 배려해주는 것도 공정의 일부라는 것을 어디에서 배울까.
<오징어 게임>이 넷플릭스가 서비스되는 거의 모든 국가에서 1위라고 한다. 이러한 놀이터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방증이다. 공정하면서도 약자를 배려하는 규칙이 존재하는 놀이터. 어린 시절 놀이터의 모습은 국가의 차이, 문화의 차이를 막론하고 비슷하다는 방증이다.
<오징어 게임>의 세계적 인기는 승자와 패자가 극명하게 갈리는 세상이 되었다는 방증이며, 또한 세계가 그만큼 (좋지 않은 쪽으로) 동질화되어가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