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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천 Dec 29. 2021

파커 만년필

어젯밤, 아들 아이가 조그마한 박스를 여러 개 들고 오더니 식구들마다 나누어주었다.


"선물이야.“     


파커 볼펜.      


펜마다 각자의 이름을 새겨 넣은 것이었다. 펜을 넣는 가죽 파우치도 함께 들어 있었다.     


"하하. 고맙다. 근데 아빠는 펜 별로 안 쓰는데."     


"아들이 준 거니까 써요!"     


옆에서 자기 펜을 흐뭇한 표정으로 살펴보던 아내가 단호하게 말했다.     


"어, 그, 그래. 써야지."     


나는 사실 고급 필기구에 별 관심은 없다.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쓴다. 워낙 악필이어서 그렇기도 하고, 요즘은 펜으로 쓸 때보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하는 일이 훨씬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들 아이도 나 못지 않은 악필이지만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메모하는 것을 좋아한다. 선물은 자연 자기 취향을 따르기 마련.     


아이가 선물한 펜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파커 만년필. . .     


오래 전 선친께 한 선물 중 가장 많은 것이 바로 파커 만년필이었다. 늘 뭔가 쓰시던 선친이 가장 애용하신 필기구가 만년필이었기 때문이다. (선친은 컴퓨터로 글쓰는 법은 끝내 익히지 못하셨다.)     


그래서 만년필을 여러 개 갖고 계셨는데 어떤 만년필은 시간이 지나면 잉크가 적정량보다 많이 나와 글을 쓰다 보면 소매에 묻기도 했다. 그러면 어머니의 잔소리가 뒤따랐다. 소매에 잉크가 묻으면 세탁에 손이 많이 가기 때문이다. 그래도 선친의 만년필 사랑은 그치지 않았다.      


선친이 가장 즐겨 쓰신 만년필은 지인이 외국에 다녀오며 사온 독일제였는데, 촉이 다 닳아 더 이상 쓰지 못할 때까지 쓰셨다. 한국에 그 브랜드의 지사가 있었더라면 수리해서라도 쓰고 싶어하셨는데 아쉽게도 한국에서는 부품을 구할 수 없었다.     


나는 일 년에 한 번 정도 선친께 만년필을 선물해드리고는 했는데, 당시 내 호주머니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가장 무난한 만년필이 파커였다. 몽블랑이나 워터맨 같은 최고급 브랜드는 엄두를 못냈다. 지금이야 마음 먹으면 사드릴 수 있지만 선친은 이미 가신 지 오래다.      


나도 젊을 때는 한동안 만년필을 쓰기도 했다. 선친이 만년필로 글을 쓰시던 모습이 좋아보였기 때문이기도 하고, 볼펜보다 필기 속도는 느리지만 펜을 움직일 때마다 사각사각거리는 그 소리와 느낌이 좋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결국은 편리를 좇아 볼펜으로 바꾸었지만. 그래도 가끔은 만년필의 촉감이 생각나고는 한다. 볼펜보다 속도는 느리지만 그 때문에 글이 더 차분해지는 만년필.     


아이가 준 펜을 쓸 때마다 나는 내가 선친께 드렸던 파커 만년필을 떠올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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