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이라는 이름의 야만

by 윤이

목적지에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퇴근시간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이 난리통이 가져다주는 불편이 이제는 그러려니, 당연하게 여겨졌다. 문득, 장애인 연대 시위가 지하철역에서 일어났던 일이 떠올랐다. 이 북새통에 시위라니, 이는 장애인의 권리를 찾기 위한 시위의 한 형태이다, 아니다, 다수의 불행과 불편을 야기하는 장애인들의 시위는 비문명적이다,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다원화와 다양성의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편가르기 논쟁이었다. 폐허 속에서 위대한 문명을 일군 대한민국, '더 나은 문명'을 위한 발걸음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에 대한 싸움. 나는 그 양쪽 중에서 어느 편을 들어야 할 것인가, 가방을 감싸쥔 채 간신히 숨을 내쉬고 있는 문명의 자손으로서 과연 어느 길을 택해야 할 것인가.


나의 문명이란 뭘까. 문명의 반어는 야만인데, 사회적으로 '진화'하지 못한 것들을 '문명인'의 관점에서 총칭하는 말이다. 문명인의 관점에서 야만인인 사람이 자신을 스스로 야만인이라고 말하는 경우는 드물다,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문명인의 폭력적인 압도에 의한 수긍에 기인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즉 문명이라는 단어는 소수자 혹은 약자에 대한 강한 폭력성을 담고 있다.


그 무지몽매한 야만인에 비해 문명인은 마치 유토피아의 이상향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모두가 공명정대의 준칙 아래 상호공존하는 삶을 향유한다. 현생 인류가 추구해야 할 가치를 선도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세계, 과연 그것이 우리가 속한 문명의 세계인가? 그 문명의 세계에 "시위꾼" 장애인은 도무지 설 자리가 없다는 말인가? 문명이라는 단어를 소수가 다수를 압박하고 권익을 해친다는 구상 아래 사용하는 것은, 다수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한 정치적 담론 설정과 무관할 수 없다.


국민의 혹은 인간의 기본권을 보장해야 하는 것은 우리나라와 같은 민주국가에서 대부분 지향하고 있는 헌법 가치이다. 장애인의 이동권의 경우 역시 헌법상 보장해주어야 하는 권리이며, 따라서 그것을 보장해 달라는 시위는 정당하다. 그런데 그 시위가 '과격한' 형태로 진행되어 비장애인의 권익 실현과 충돌하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정치적으로 어떤 계산을 해야 할까. 장애인과 비장애인 각각의 지지에 따른 정치권력 변동 가능성은 어떠한가를 따져, 최대한 다수의 지지를 확보할 수 있는 방향으로 담론을 구성해야 한다. 그 담론은 철저하게 장애인의 편익과 비장애인의 편익을 구분하여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양자택일을 하도록 강요한다. 그 담론 자체가 아닌 담론의 내용에 집중하는 사람들은 자연스레 양자 중에서 지지 방향을 선택한다.


어느 한쪽의 불편과 불행과 불이익이라는 담론 속에서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굳이 그 틀에 말려들 필요가 없다. 다만 국가와 정부와 위정자를 탓하고 개선을 요구하면 된다. 애초에 기본권 실현에 대한 실천이 미흡했기 때문에 시위가 일어났고, 그것은 장애인이나 비장애인 국민 어느 한쪽의 잘못 보다 국가와 정부와 위정자의 잘못에 기인한 바가 크기 때문이다.


난 정치 세계에 들어서지 않아 내부 역학관계를 멀찍이 지켜볼 뿐이지만, 이런 면모들을 보고 있자면 슬픈 마음이 든다. 정치란 그런 것이다, 정치권력의 획득을 위해 사정없이 '적'을 무찔러야 하고, 그것은 나의 정치적 이상의 실현을 위해 정당화될 수 있는 거라 확신해야 한다,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런 사람, 그럼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어야 '민주'정치가 흥왕할 수 있다.


비판의식을 가지는 일이 더없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되새긴다. 덜컹거리고 비좁은 차 안에서, 양자택일의 담론에 갇히지 않아야겠다, 갇힌 사람에게 생각의 여지를 넓히는 실마리를 주는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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