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게임을 좋아한다. 그런데 공부도 좋아한다. 게임과 공부에 대한 관심은 마냥 반비례 관계인 건 아닌가?
공부에 싫증이 날 무렵엔 게임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고, 그렇게 게임을 하다가 갑자기 내가 이걸 해서 뭐가 남나 하는 한심함을 느낄 때면 공부가 주는 '짬뽕'의 맛을 찾아간다.
여러 재료를 내 시야 안에 넣고 논리라는 요리법을 통해 완성된 성취감. 완성된 결과가 다소 짜거나 매운, 허술한 것이라 해도 요리를 해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직접 만든 요리에 대해 생기는 애정 어린 시선과 그 요리가 가져다주는 따뜻한 행복이란. 그러다가 반복된 요리의 굴레에 지쳐버린 때에는 의자에 120도 자세로 앉아 무념무상으로 나무검을 휘두른다.
이러나저러나 게임이나 공부를 하면 할수록, 도대체가 그대로인 것이 없다. 게임에서 멧돼지를 하나 때려잡으면 레벨이 오르고, 논문을 하나 읽으면 그동안의 시야가 일변한다. 무얼 하든 성장하거나 오히려 퇴보하지, 있는 그대로 온전한 것이 없다.
묘한 것은, 난 무언가 변하는 걸 그리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것이다. 게임을 해도 체력이 1도 닳지 않고 멧돼지를 잡고 싶고, 공부를 해도 지금의 시야가 가진 '정답'을 잃고 싶지 않다. 지금의 당장의 온전함이 주는 안정감, 변화가 가져올 변화에 대한 불안이 나에게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야말로 그야말로 '꼴보수' 아니겠는가.
태초의 결합에서부터 이어지는 변화는 지금의 나를 끊임없이 만들어가고 있지만, 정작 내 의식은 그 변화를 불안해하고 못 미더워한다. 이렇게 의식이 신체보다 발달이 지체되는 걸 보면 역시 신체가 건강해야 의식이 건강하다는 말을 실감.
온전함의 변화를 불안해하는 것은, 사실 '오답'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삶에 정답과 오답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정답으로만 살아가고 싶은 나의 약한 자의식의 표현이다. 남들이 공인한 쉬운 길, 편한 길, 많이 가본 길을 별 저항 없이 정답으로 여기는 삶.
'1+1=3'과 '1+1=수박'이라는 두 식을 보고 정답 30% 오답 70%라거나 정답 20% 오답 80%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둘 다 어찌 됐든 오답 100퍼이고 이론의 여지가 없으니 별 무리 없이 곧 기억에서 잊힌다. 이런 논리에서 '나'는 현재 정답 100인가 오답 100인가?
다들 인생 1회 차의 삶을 사는 와중에 감히 누가 무엇이 정답 100이고 오답 100이라고 기준을 세울 수 있을 것인가. 온전한 정답과 온전한 오답이 없으니 온전한 삶 역시 있을 수 없다. 결국 온전한 것은, 변화하는 것 자체임에 틀림없다.
게임을 하다가 게임 랭킹 1등의 아이템과 능력치를 보고, 저 사람도 처음부터 정상에서의 삶은 없었겠지, 내 모자람의 변명글로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