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날 때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축구 이야기를 함께 하면서 나를 수다쟁이로 만드는 친구가 있다. 어느 날 그 친구가 나에게 전화를 하더니 다짜고짜 말했다. "윤아, 결혼식 6월 모일이야. 네가 사회야 ㅋ"
이 뜬금없고 아무 맥락도 없는 말에, 종이의 산으로 이루어진 연구실에 홀로 앉아 있던 나는 별다른 질문 하나 없이 덥석 알겠다고 대답하고 다시 책을 훑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책을 덮고 곰곰이 생각했다, 이 자식은 나를 뭘 믿고 자기 결혼식의 사회를 나에게 맡긴 것인가. 서로 만나온 시간이 제법 된다지만 이런 큰 퍼즐 조각을 나에게 주어도 괜찮은 것인가. 고마운 한편으로 떨렸다. 야, 이거 어떡하지.
정신이 번쩍, 사회 관련해서 생각해 둔 진행이 있냐, 순서와 동선은 어떻게 할 거냐, 대사는 있냐, 공간에 대해서 사전 파악을 하러 가야 하냐, 전화를 걸어 별별 질문을 해댔다. 야, 너는 아무것도 모르는 풋내기한테 이런 중요한 역할을 주냐.
진행 멘트를 말의 리듬과 내 호흡을 고려하면서 메모해 가며 수십 차례 읽었다. 새 와이셔츠를 준비하고 가장 깔끔한 외투를 골랐다. 관혼상제 중 혼례에 해당하는 평생의 대사, 그것도 남의 대사에 내가 폐를 끼칠 수는 없었다. 올빼미 인간답지 않게 이른 저녁부터 취침하고 식장에 일찍 도착해 연습을 거듭했다.
식이 끝나고 내게 고맙다고 말하는 친구와, 목소리가 좋았다고 말하는 지인들 앞에서도 나는 계속 아쉬웠던 점을 떠올렸다. 아휴 거기서 좀 자연스럽게 대처할 걸, 거기서는 왜 그랬을까...
나는 책임감이 없는 편이지만, 다른 사람의 부탁은 제법 잘 해내려고 한다. 오히려 '내 것'에 대한 책임감이 덜해서 각종의 이득을 잘 못 챙기면서 산다. 그런 "뭐, 어때"의 마음가짐은, 친구의 저 뜬금없는 한 마디에 돌연 '엄격근엄진지' 모드로 바뀌곤 하는 것이다.
공부도 마찬가지, 스스로 해나가는 공부에는 도대체가 책임감이 없다. 목표는 있으되 하루 미루고 일주일 미루고 미뤄진 만큼 쌓이는 숙제와 죄책감은 고단하다. 지금 당장도 아직 한 글자도 타이핑하지 못한 토론문도 써야 하고 할 일이 많지만 맥없이 자빠져 있다.
그런 내게, 그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뭐 하냐, 나 지금 축구 보러 왔는데 생각나서 연락했다, 오랜만에 이겨가지고 다행이다, 이제 선수 사인받으러 갈 건데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조만간 같이 축구 보러 가자, 경기가 이날 있는데 같이 갈래, 아예 정해버리자..."
그래, 너랑 축구를 온전한 마음으로 보러 가기 위해서라도 이 지루한 숙제를 끝마쳐야겠지. 이 숙제의 끝자락에 무엇이 보상으로 매달려 있을지는 모르지만, 하나는 분명하다, 지금보다는 훨씬 홀가분한 마음으로 축구도 보고 술도 마시고 낄낄껄껄 할 수 있다는 것.
그 친구의 전화는 나를 일으켜 세웠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하는 일은 이렇게나 힘이 세다. 그 마음을 받는 나는 기어이 일어나고야 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