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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캔디 Jun 10. 2023

처음이라 서툰 ‘엄마사람’의 성장통

[윤캔디의 성장에세이]  PART 1. 상처데리고 살기

 어렸을 적부터, 엄마, 아빠를 한 개인으로서 들여다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건 어떠한 논리 없이, 내가 우리 엄마 아빠의 딸로 태어난 것과 같이 내게 그냥 엄마는 엄마, 아빠는 아빠였다.

 한 사람으로서의 그들 인생보다는 마치 그들이 태어날 때부터 나의 ‘엄마’, ‘아빠’의 역할을 소명받아, 늘 그렇게 살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들이 엄마로서, 아빠로서 그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엄마는 엄마답게, 아빠는 아빠답게. 


 하지만, 그것은 불완전한 한 사람이, 삶의 길에서 만나며 생긴 자잘한 상처들을 안고 살아가다, 그저 그 한 사람이 우연히 엄마가, 아빠가 되었다는 사실. 그렇기에 엄마, 아빠의 역할을 부여받은 그들도 그저 서툴 수밖에 없다는 사실. 그것을 내가 부모라는 옷을 입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또 이런 나 개인의 서툼과 상처로, 까끌해진 나의 어떤 면이 아이들에게 닿아 그들의 여린 살을 조금이라도 아프게 할 때면 속상한 마음에 잠들지 못하고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 것이 부모구나...라는 것도 아이를 키워가며 알게 되었다.



 첫째는 어렸을 적부터 잔병치레가 많은 편이었다. 20대의 젊은 산모였기에 아이도 당연히 무리 없이, 건강하게 쑥 나을 줄 알았다. 

하지만 예정일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어 병원에 검사를 받으러 갔다가 갑자기 태아의 심박동 수가 잘 잡히지 않는다고 해서, 응급으로 수술실에 들어가게 되었다. 

 예정에도 없던 수술을 해서 몸도, 마음도 준비가 하나도 되어있지 않았다. 그날, 내 귀에는 커다란 링 귀걸이가 있었고, 손에는 매니큐어도 알록달록 칠해져 있었다. 


그래도 오후 수술이라고 하니, 남편에게 시간을 말해주고 천천히 와도 된다고 침착하게 안내해 주었다. 그리고 예정 수술 시간은 오후 5시쯤이었다. 


그러나, 의사 선생님은 상황이 긴급하다고 판단을 했는지 심박동 수를 체크하던 집개를 갑자기 모두 빼고 일사천리로 수술을 준비했다. “어?”하다 보니 정말 나는 차가운 수술실에 누워있었고, 마취선생님이 내 등에 주사를 놓고 있었다.  

 날짜가 다가왔던 터라 친정 엄마가 서울에 와 계셨으니 망정이지, 정말 갑자기 수술실에 들어가서 혼자 덜컥 아이를 낳을 뻔했다. 

“응애응애” 하는 소리와 함께 아이가 태어났고, 정말 드라마처럼 아이가 나오는 바로 그 순간,  남편이 도착해 아이를 안았다. 


‘이 나쁜 놈 내가 천천히 오랬다고 진짜 천천히 오냐.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데...’라는 생각도 잠시, 나는 태어난 아이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마취의 부작용으로 열에 들끓고 비몽사몽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회복실에 누워서 조금씩 정신을 들 때쯤, 간호사 선생님이 아이를 내 품에 안겨주었다. 그리고 엄마 젖을 물려보라며, 아이와 자세를 잡아주셨다.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 살포시 옷의 단추를 여는 순간, 아이는 내 젖가슴을, 마치 배우기라도 한 냥 본능적으로 앙 하고 쭉쭉 빠는 게 아닌가.


 그 순간 눈물이 정말 또르르 흘렀다. 사실 모유수유를 1년 넘게 해 오며, 내가 정말 여자인가 동물인가 이런 생각이 들었던 적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이 순간만큼은’... 
아이와 내가 처음으로 조우해서, 아이가 내 살에 닿아 앙하고 무는 바로 이 순간, 나는 ‘엄마’로서의 그 신성한 문을 열게 된 것이다. 


 그때 그 눈물의 느낌은 지금도 너무나 생생하다. 정확히 왼쪽 눈에서 예고도 없이 주르륵 흐르더니, 목구멍에서 마음에 이르는 길까지 소리 없이 흘러가는 듯한 느낌. 너무나 뜨겁고 벅찼던 그 눈물. 엉엉 우는 소리도 나지 않고, 어깨의 흔들림도 없는 강인하고 묵직했던 ‘엄마’가 된 나의 눈물. 


 그렇게 나는 천사를 만났고, 갑작스러운 수술로 정말 걱정했지만 다행히 우리는 모두 건강했다. 식물에 작은 새싹이 하나만 돋아도 참으로 신기롭고 기쁜데, 나와 내 반쪽이 만든 한 생명체가, 한 사람이라는 존재가, 쑥쑥 커가는 모습을 함께해 나간다는 건 정말 경이로운 일이었다.



 건강했던 첫째 아이가 잔병치레가 많아진 건 돌 이후부터였던 것 같다. 원래 아가들은 돌 이후부터는 엄마 몸에서 받은 면역력이 사라져 자주 아플 수 있다고는 했지만, 우리 아이는 그 횟수도 횟수이지만, 한 번 감기에 걸리면 잘 낫지 않고 항상 중이염으로 이어지는 패턴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렇게 생긴 귀의 염증은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잘 낫지 않아 항생제를 달고 살아야 했다. 


  엄마가 처음이었던 나는, 또 비교적 어린 나이에 갑작스럽게 ‘엄마’라는 존재가 되었던 나는, 일과 육아 생활을 병행하며 주변에 비슷한 ‘엄마친구들’과 만남 또한 제대로 없었던 나는, 그저 혼자 고군분투할 수밖에 없었다.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낳은 엄마들끼리 ‘동기’ 만남이 시작되는 산후조리원에서조차 교재를 만드느라 책과 아이만 봤던 내게 스승님은 핸드폰 속 초록창이었다. 매일 초록창을 검색해 ‘중이염’, ‘항생제’ 등을 검색해 보며 공부를 해나갔다.

 혹시나 아이의 기관지가 약한 것이 내가 청소를 깨끗이 하지 않아서인가 싶어  매일 아침 침구청소를 하고, 먼지를 한 톨도 없이 닦아 댔다. 일주일에 세네 번 강의를 이어가고 있었기에, 쉬는 날이면 기관지에 좋다는 재료로 이유식을 만들고 간식을 만들며 부족한 엄마로서의 빈 시간들을 메꾸어 나갔다. 

 그래도 차도는 없었다. 급기야 항생제 부작용으로 아이의 피부가 잔뜩 뒤집어지는 일들만이 반복될 뿐이었다. 


 나의 노력으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것에 마음이 아팠고, 또 혹시 내가 아이를 가지고 힘들어했던 시간들이 내 아이를 이렇게 아프게 한 건 아닐까. 아니 그게 맞는 것 같아서 매일 밤 잠든 아이의 손을 붙잡고 미안하다고, 

 ‘엄마가 너 꼭 낫게 해 줄게, 엄마가 널 가지고 힘들어했던 건, 엄마가 정말 갑작스러워서 그랬던 거야. 엄마가 우리 아들 정말 사랑해. 우리 아들 아프지 말자, 엄마가 미안해’ 하며...




 또 그럼에도 내 욕심에 강의 일은 완전히 놓지 못했다. 강의하던 중 모유로 부풀어 올라와 가슴에 통증이 올 때면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화장실에 가서 모유패드를 갈아야만 했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자마자, 다른 선생님들께 인사할 새도 없이 차에 탔다. 그리고 제일 가까운 휴게소에 들러, 휴대용 유축기로 꾹꾹 눌러가며 모유를 짜냈다. 


 ‘지금 넌 얼마나 내가 보고 싶을까. 엄마 살냄새가, 엄마 우유가 얼마나 그리울까, 그런데 난 또 이 욕심에 이렇게 일을 하고 있네. 뭐가 맞는 걸까?’ 그리고 터지는 눈물을, 내 마음속 ‘엄마로서의 나’와 20대 꿈 많은 ‘청춘의 나’와의 시끄러운 싸움을 또 그렇게 꾹꾹 잠재웠다.


 항상 집을 나오기 직전의 순간까지 또, 강의가 끝나면 바로 들어가 아이를 돌보았기에 양질의 음식을 챙겨 먹지 못했다. 편의점이나, 휴게소에 잠깐 들러 운전하면서 간단히 요기를 때우는 게 일하는 날의 일상이었다. 

남편은 현장 일로 늘 바빴고, 육아휴직은 그의 업계에서 엄두도 낼 수 없는 것이었다. 


 강의가 있는 날에는 친정엄마나 시어머니께서 아이를 돌봐주시러 오시긴 했지만, 난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는 꼭 내 품에서 내 손으로 아이를 어루만져주고 싶었다. 

그건, 아이가 너무 사랑스러워서이기도 했지만, 뱃속에 있을 때 제대로 된 태교는커녕, 눈물로 힘들어하던 임신초기. 나의 지난날에 대한 책임이자 그리고 아이에 대한 사죄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게 또 미안했다. 그렇게 잘 챙겨 먹지 못해, 내 모유에 영양 성분이 없어서 우리 아이가 이렇게 아픈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지금 되돌아보면 참 답답해 보이지만, 엄마사람도, 이렇게 내가 낳은 아이가 아픈 경험도 처음인 나는 그저 다 ‘내 탓’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가 선천적으로 기관지가 약하게 태어날 수도 있고, 또 어느 정도 크면 괜찮아진다는 건. 바로 눈앞에 직면하고 있는 순간에는 하나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내가 이 아이를 낳고 키우고 있으니, 그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의 화살은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화살은 주변의 그 누가 쏜 화살이 아닌, 내가 나 스스로에게 쏘는 화살이었다. 


 아이는 네 살이 되던 해, 수술을 할 수 있는 몸무게에 도달하자마자, 편도 절제술을 하게 되었다. 중이염의 재발 횟수도 이미 일반적인 아이들의 범위를 벗어났고, 이미 너무 많이 먹은 항생제로 약도 잘 듣지 않는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렇게 수술을 결정하기 전까지, 동네병원부터 대학병원까지 정말 많은 병원을 오다니며 동, 서양, 그리고 모든 민간요법까지 공부해 가며 아이를 낳게 해 주겠다는 일념으로 노력했다. 


 그리고 난 그 노력이 지금까지도 참 미안하다. 그렇게 병원을 데리고 다니며, 아이를 너무 힘든 게 한 건 아닌지, 의사 선생님을 만날 때마다 눈물 흘리며 이야기하는 엄마를 보고 아이는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혹시라도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 


 아이는 기관지가 조금 약하게는 태어났지만, 천성이 예민하지 않고 순둥이 인지라 잠도 잘 자고, 떼쓰며 엄마를 힘들게 하지 않았다. 병원이라는 공간이 익숙해서인지 울지도 않고, 진찰과 치료도 모두 다 큰 애처럼 받는 것이 아닌가.  난 이게 왜 그렇게 마음이 아픈지. 



 그렇다. 나는 아이를 키우며, 모든 과정들을 넘치는 사랑에 비례해 미안함도 함께 채우고 있었던 것 같다. 아이를 낳고, 매일매일 단 한순간도 내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럼에도 지나온 순간 내가 더 현명하지 못했음에 더 강인하지 못했음에, 또 어른답지 못했음에 미안해지는 게 엄마라는 사람의 숙명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눈물과 맘 졸임으로 키운 아이는 이제 어느덧 초등학생 형님이 되었다. 그리고, 나도 이제는 육아계의 형님이자 아이 둘의 ‘강인한 아줌마’가 되어, 웬만한 일에는 눈물을 보여주지 않고,  또 맘 졸이며 걱정도 하지 않는다. 

 

 그저 넘치는 사랑의 마음을, 말로, 몸으로, 눈빛으로 아이들에게 느끼게 해 주기에도 하루하루가 참 바쁘다는 것을, 또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일까. 아이가 자라며, 부모도 같이 자란다고 하는 말은 진실로 맞다. 


 그럼에도, 내가 엄마로서 서툴었던 지난날의 모습들, 아이 앞에서 보였던 눈물들은 모두 잊어줬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는 게 나다. 또  여전히 서툴 수밖에 없는 내 모습들은 훗날 기억하지 않고, 그저 그 사랑의 마음만 듬뿍 가져갔으면... 하는 마음을 가져보기도 한다. 


 그렇게 불완전한 인간으로서의 내가 아니라 ‘좋은 엄마’로서의 모습으로만 기억해 주길 바라는, 부족한 모습은 보여주기 싫은 게 또 엄마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또 안다. 


내가 그랬듯, 우리 아이들도,
엄마 ‘사람’으로서의 내 인생을 모두 이해하고 보듬어줄 거라는 걸. 

 그래 선애야, 너무 완벽하려고 하지 말자, 부족하고 서툰 엄마라도 괜찮아

‘엄마’로서의 나도 아이들과 함께 자라야 하는 거니까. 그렇게 커가고 있는 거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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