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캔디의 성장에세이] PART 1. 상처데리고 살기
난 충북여고 출신이다. 충북여고는 충청도 청주라는 작은 도시에 있는 학교로, 내 청소년기는 청주에서 쭉 이어졌다. 그리고 부산에서 1년, 베트남에서 4년 반을 지냈으니, 회사생활을 하기 전까지는 서울에 주거지를 두고 살아본 적은 없다.
지방에 사는 사람들에게 서울은 조금은 각별하다. 어렸을 적 부터 서울에 대한 동경을 품고 자라게 된다.
왠지 서울에 가면, 반짝 반짝 내 꿈도 화려하게 모두 이루어질 것 같았다. 인서울 대학에 실패하고, 좌절감이 컸던 건 꼭 내 꿈이 좌절된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울은 내 꿈을 다시 회생시켜주었다. 나는 ‘큰~’ 서울에 있는 ‘큰~’ 회사에 들어갔고, 내 꿈도 같이 쑥쑥 커나갈 설레임만을 마음에 가진 채 상경하게 되었다.
회사는 사당역에 있었기에, 집은 회사와 한 정거장 차이가 나는 낙성대 역에 살 곳을 정했다.
나는 당시에 베트남에서 막 건너온 촌년(?)이었기에, 서울에 대해서는 커녕 한국 물정도 제대로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런 내가, 얼떨결에 바로 취직이 되어 서울에 오게 되었다.
그리고 집을 얻는 일은 내 사회생활 멘토이자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기도 했던 아빠와 함께 하게 되었다.
아빠의 차를 타고, 서울에 올라 오던 날. 나는 모든 게 들떠 있었다. 서울로 올라오는 길 내내 난 재잘재잘 되며 그 설레임과 기대를 아빠에게 말했다. 마치,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 생각에 마구 설레여 하며, 온 종일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서울과 거의 연애 시작단계였다. 오랜 직장생활로 사회생활의 연륜이 있으셨던 아빠는 내게, 사회생활 선배역할을 자초하며 이런 저런 직장생활 꿀팁(?)들을 아주 자신있게 전수해주셨다.
그리고 드디어 서울 도착. 우리는 역 앞에 있는 작은 부동산에 들어가 한 군데씩 내가 살아갈 곳을 보기 시작했다.
우리의 예산은 한정되어 있었고, 한정된 예산에 비해 우리의 조건은 까다로웠는다. 서울 생활을 해본 적 없는 ‘딸’이자 ‘여자’였기에 지하철 입구 역에서 걸어서 5분이상 들어가면 안된다는 ‘초역세권’의 조건.
그렇게 우리는 몇 개의 후보군을 둘러보았는데, 하나같이 방이 참 작디 작았다.
베트남에서도 원룸 자취생활은 해보았지만, 그래도 한 공간 안의 여러군데 에서 활동을 나누어 할 수 있었다.
여기서는 잠을 자고, 여기서는 공부를 하고, 여기서는 요가를 하고, 여기서는 탁자를 두고 밥을 먹고 말이다.
하지만 서울의 원룸은 그것과는 달랐다. 한 공간안 딱 한 군데에서만 모든 활동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한 군데에서, 잠을 자야 했고, 이불을 개고 그 자리에서 상을 펴서 밥을 먹고, 또 그 자리에서 매트를 깔고 요가를 해야했다.
또 거짓말 아주 조금 보태면, 잠을 험하게 자면 바로 신발과 껴안고 잘 수도 있는 곳이자, 세면대와 변기 사이에서 샤워를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좁디 좁은 상자같은 방이었다.
같은 가격에 조금 넓어지면, 창문이 없거나 혹은 가구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조금은 좁더라도 빛은 들어오는 또, 어느정도의 사람이 살수 있는 형태는 갖춘 방을 선택하기로 결심했다.
방을 둘러보고, 계약을 할 때쯤 아빠는 더 이상 차에서의 그 자신만만한 멘토가 아니었다. 체력 탓인지 혹은 그 좁은 방들에 꽉 눌려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참 지친 모습으로 내게 서글픈 한마디를 남기시고, 떠나셨다.
“아빠가 이것 밖에 못해줘서 미안해”
“아빠 괜찮아, 내가 나중에 돈 벌면 큰 집으로 가면 되지 뭐!”하고 아주 씩씩하게 웃었다.
그리고 나는 아주 조금 큰 집에 가려면 꽤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반짝반짝 화려하지만 자비란 없는 녀석이 서울이라는 것을. 서울과 깊이 친해져가며 알게되었다. 역시 연애 초반에는 숨겨진 모든 것을 알 수 없는 법이었다. 그래서 그랬나보다. 그래서 아빠는 그렇게 서글픈 얼굴이었나보다.
다음 정거장에 있는 내 회사는 정말 크고 화려한 곳이었다. 방송국이자 쇼핑회사.
이 곳은 드라마 촬영지로도 몇 번 나온 적이 있는 곳으로, 사원증을 찍고 들어가면 정말 다른 세상으로 장면전환이 된 것만 같았다. 마치 화려한 파티장에 온 것 처럼 말이다.
‘리얼 자본주의’의 축소판 세계에 발을 디딘 나는 사실 그 파티를 즐기지 못했다. 내 역할은 홈쇼핑의 ‘꽃’이라 불리는, 기획자. 그것도 가장 큰 매출을 가지고 있는 TV채널의 MD였지만, 나는 어쩐지 그 판을 즐기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아마 회사에서의 나와, 작은 원룸방에서의 나의 간극이 굉장히 컸기 때문이 아니였나 싶다.
화려한 파티를 끝내고, 사원증을 찍고 유리문을 나서고 나면, 마치 마법이 풀린 신데렐라 같은 느낌이었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예쁜 구두를 신고 있다가, 마법이 풀려 원래 입고 있던 누더기 옷을 입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신데렐라. 그리고 그 신데렐라는, 일단 너무 외로웠다.
이상하게 퇴근은 빨리 하고 싶었지만, 집에는 빨리 들어가기 싫었다. 그래서 퇴근 후 나는 집근처 역을 배회했다. 역 앞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고, 또 근처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고 잘 시간이 다 되어서야 집에 들어갔다.
대학생활을 베트남에서 한 지라, 서울에는 맘 붙일 친구도 없을 때 였다.
매일 밤, 서울살이의 외로움과 서러움이 만든 허기짐을 달래주는 건, 집 앞 편의점 간식들 뿐이었다.
집에 들어오는 길목에 있는 편의점에서 참 많이도 꽉꽉 담았다.
그리고 봉지 속 가득 찬 과자는 (참 지금 생각하면 경이롭기 까지 하지만) 내 뱃속으로 다 들어갔다.
그렇게 회사생활과 서울생활에 1년 조금 넘게 발을 붙였을까. 10kg이 훨씬 넘게 살도 함께 붙었다.
정말 고백하기 싫은 이야기지만, 나는 그 때 ‘초콜렛을 먹다가 입에물고 잠들 수도 있구나’ 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아마 회식 끝나고 술이 조금은 취했던 날로 기억한다. 변명해보자면, 내 자아와는 상관없는 ‘술, 너 때문이다’)
그렇게 조금은 사람답지 못한 생활이 이어졌다.
집도 내 마음을 그대로 반영이라도 하듯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아니 이런 완곡한 표현보다는 직설적으로 ‘참 더러웠다’가 맞을 것이다.
전날 먹은 간식봉지들이 2,3 일 방치되기 일쑤였고, 작은 방의 건조대에 옷을 널면 걷다가 툭하면 몸에 부딪혀 와르르 떨어지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빨래는 바로바로 개지 않았다. 아무튼 지금의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못난 모습 투성이다.
빨래는 자꾸만 쌓이고, 빨래가 하기 싫어 옷은 참 많이도 사다 날랐다.
‘이건 내가 꿈꾸던 사회생활이 아니였는데...’ 나는 바뀌어야 했다.
하지만, 이 공간에서는 도저히 바뀔 수 없을 것 같았다. 이사를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이제 겨우 입사 1년차였던 나의 월급은 여전히 빠듯했다.
그러던 중, 청주에서 함께 올라와 고시원에서 살고 있는 꽤 친했던 고향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우리는 너무나도 같은 처지였기에. 그리고 서울 사람들 사이에 동향이라는 이 끈적한 동지애로 의기투합하게 되었다.
“우리, 같이 살자!”
우리에게는 조금 더 넓은 공간도 필요했지만, 서울 살이에서 홀로지내며 외로움에 지쳐있었기에 조금이라도 의지할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린 여전히 사회초년생이었고 여전히 선택할 수 있는 보기는 많지 않았다.
그렇게해서 선택한 집은 빌라의 반지하였다. 반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역세권 안의 빌라 였기에 보증금이 꽤나 비쌌다. 그래도 친구가 받은 ‘청년 보금자리 대출’로 우리는 드디어 서울아래 함께 몸붙이고 살 공간을 얻게 되었다.
창문을 열면 다른 사람들의 지나가는 발이 보인다는 건, 조금은 야릇한 기분이었다. 누군가의 발 아래 살고 있는 듯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묘한 느낌의 반 지하.
반지하였지만, 서울아래 맘붙일 친구와 몸을 함께 부대고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 많은 위안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지하’ 이 세글자는 어디서 당당하게 드러낼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어디서 주소를 적어야 할 때면, 꼭 ‘지하 02호’라고 적지 않고 ‘B 02호’라고 적었다. 그러면서도 택배는 기사님이 못찾으실까봐 꼭 ‘지하’라고 적는 것은 무슨 마음인지.
'그럼에도 좋았다', '청춘의 낭만이었다', 라고 기록하고 싶지만 그건 거짓이다. 그냥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반지하만의 묘한 감성은 여름철이면 올라오는 습하고 꿉꿉한 냄새와 함께 더 짙어졌는데, 내 옷이며 가방에도 이상하게 그 냄새가 베어 있는 것만 같았다. 집에서 나올 때면 꼭 향수범벅으로 그렇게 반지하의 흔적을 덮었다.
물론 반지하 방에서도 서울 아가씨인 나는 아주 바쁘게, 그리고 꽤 잘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잘나가는 ‘나’와 내가 사는 ‘집’의 간극을 메꾸기에 서울 그곳은 너무 버거웠다.
내가 ‘조금' 잘나간다고 해도, 잘나가는 동네는 아직 네가 올때가 아니라며 발을 디딜 틈조차도 허용하지 않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래서 생각도 없던 결혼이, 순서도 뒤죽박죽으로 그렇게 빨리도 진행된 게 아닌지 모르겠다.
몸도 마음도 진짜 붙일 수 있는 공간이 그리고 내 사람이 아주 본능적으로 필요했기에.
‘청춘의 낭만’이라고 적기에는, 조금은 서글픈 나의 서울살이 일지다.
그럼에도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나날들은 기억의 조각에서 언제나 소중한 법이다.
작은 공간에서, 그럼에도, 늘 꿈은 크고 넓었던 나의 청춘을 안아본다.
그리고 네가 어느 곳에 있었든, 넌 빛이 났었다고 속삭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