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캔디 성장에세이] PART 1. 상처데리고 살기
‘엄마’라는 두 글자만 들어도 마음이 울렁인다.
그 울렁임은 아주 잔잔하다가도, 또 몰아치듯이 확 다가오기도 하는 것이다.
나 역시 두 아이의 엄마이다. 아이들을 너무 사랑하지만서도 가끔씩 ‘엄마’로의 내 삶이 버거울 때가 오기도 한다. 그리고 이럴 땐 어김없이 우리 엄마 생각이 함께 나며, 마음이 애리다.
엄마는 젊었을 적 부터 아름다우셨다. 내 나잇 적의 엄마 사진을 볼 때면, 지금의 나보다도 빼어난 미모에 놀라곤 한다. 학교에 엄마가 자모회나 행사로 오시는 날에는, 친구들이 항상 “너네 엄마 예쁘다”라고 말할 만큼 빼어난 미모이시기도 했고 또 무언가 보호 본능을 일으키는 여리여리한 몸집이셨다.
결혼 전에는 단 한 번도 엄마가 억척스럽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또 무척 강인한 여자라고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건 엄마가 너무나도 예쁜 여자였기에 뿜어나올 수 없는 어떤 요소이기 했고, 또 단 한 번도 자신이 지고 있는 삶의 짐이라는 무게에 대해서 우리에게 티를 내거나 하지 않으시고 그저 조용히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내셨기 때문일거다.
엄마는 아빠와 결혼하기 전에는 대학가에서 식당을 하셨다고 한다. 20대의 젊고 예쁜 두 자매가 하는 식당이라니, 정말 인기가 많았을 것이다.
또 우리 엄마의 음식은 엄마 자신처럼 정갈했다. 자극없이 밋밋한 맛일것 같지만 입에 넣는 순간 감칠맛이 입 안 곳곳에 스며들고야 마는 엄마만의 맛.
매일 재료가 다 떨어져서 문을 닫고, 두 자매는 두둑한 현금을 세어 매일 밤, 반씩 딱! 나누어 챙겼다고 한다.
그렇게 젊고 예뻤던 우리 엄마는 식당을 하며, 아빠의 학비를 뒷바라지 했고 30평대의 아파트를 마련하셨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건, 이 때 나는 이미 4살 정도 였다는 것이다. 외할머니께서 아랫층에서 나를 봐주시면, 엄마는 하루종일 일을 했다고 한다. 식당 문을 닫으면 나를 할머니에게서 데리고와서 잠만 겨우 같이 자고 또 다음날 일을 가셨다고..
‘그래도 내가 너 단 하루도, 아무리 힘들어도 할머니 옆에 재우는 일은 없었어. 엄마가 너 꼭 데리고 와서 품에 안고 잤어’ 라며.. 그 때 함께 보내지 못한 시간에 대한 미안함이 커서인지, 지금도 이따금씩 나에게 말해준다. 그리고 나는 말안해도 안다.
엄마가 나를 얼마나 애틋해하고 사랑했을지.
아빠가 회사에서 자리를 잡고난 뒤로, 엄마는 일을 그만두셨다. 기자였던 아빠의 직업 특성상 여기저기 발령이 났기 때문에, 우리 가족은 아빠를 따라다니기에 바빴다.
그리고 아빠는 ‘진짜’ 바빴다. 행사 때마다 취재로 여기저기 다니셨고 지방선거나 대통령 선거가 있는 날이면 몇 날 며칠 집을 비우시기도 했다.
아빠가 집을 많이 비우시는 일은, 나와 동생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일이었기 때문에 서운하다거나, 아빠와 보내고 싶다든가 하는 마음도 사실 별로 느껴보지 못한 것 같다. 그냥 우리집에서는 너무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엄마는 다르지 않았을까. 우리 엄마는 그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건 나 역시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부터이다.
우리 둘을 데리고, 남편을 따라 연고도 친구도 없는 다른 도시를 1, 2년 단위로 옮겨 지내야 했던 우리 엄마. 그리고 매일이 바빴던 남편.
그럼에도 엄마는 참 밝고 씩씩했다. 지금도 엄마가 우리에게 크게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낸 기억은 하나도 없다. 엄마는 그렇게 자신의 음식처럼 우리를 정갈하게 키워주셨다.
영동이라는 작은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입학했던 나는, 매일 잔머리 없이 깔끔하게 머리를 묶고 엄마의 자전거 뒤에 타서 등교를 했던 기억이 난다. 아, 엄마의 앞에 작은 보조의자에는 동생이 앉아 있었다.
빨간 두발 자전거에 그렇게 엄마는 우리 둘을 태우고 드라이브(?)를 시켜줬다.
그 자전거는 어쩌면, 우리 엄마의 숨구멍이지 않았을까. 힘들고 외로운 나날들, 우리 둘을 태우고 힘차게 폐달을 밟으며 단발의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우리 엄마의 모습. 그 모습은 또... 엄마가 된 내 모습으로 오버랩 되기도 한다.
재밌는 건, 나 역시 참으로 바쁜, 지방 출장이 일상인 남편과 함께 살고 있다. 이건 아마도 하늘이 ‘너희 엄마의 삶을 ‘진심으로’ 이해해줘라’는 깊은 뜻이 있는 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문득, 주말에 혼자 아이 둘을 데리고 공원이든, 키즈카페든 갈 때면 어김없이 엄마가 떠오르는 것이다.
“우리 엄마 참 외로웠겠다.” 하고...
우리 남편은, 바쁘지만 그럼에도 아내에 대한 동감지수가 조금은 높은(생존을 위해 높아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특유의 예술적 감수성으로 다정한편에 속한다.
출장으로 집에 있지 못한 날은, 한 시간 가까이 영상통화로 아이들과 놀아주며 육아를 하기도 하고, 나의 힘들었던 하루의 주절거림도 묵묵히 다 들어주고 위로해주는.. 그렇게 나는 외로움과 힘듬의 하루를 위로 받으며 남편의 빈자리로 인한 마음의 텅텅 거림의 소리를 잠재운다.
그런데, 우리 아빠는, 엄마의 남편이었던 그는 늘 밖에 있었다. 그건 몸만이 아니라 마음도 그랬다. 핸드폰도 없었던 시절, 또 일을 한다는 이유로 연락도 잘 안되던 그 때. 우리 엄마는 마음에 쌓인 이야기들을 어떻게 풀어냈을까...
그리고 그렇게 묵묵히 자신의 인생을 접어두고, 우리만 바라보며 ‘엄마’의 인생을 엄마답게 묵묵하게, 또 씩씩하게 헤쳐나가고 있는 와중에 아빠의 외도 사실을 알았을 때는 또 얼마나 마음이 다 무너져 내리고 구멍이 뚫렸을까. 이건 내가 감히 가늠해볼 수도 없는 깊이의 아픔이 아니였을까.
이혼을 하신 뒤에도, 나와 동생이 성인이 될 때까지, 그리고 내가 결혼을 할 때까지 엄마는 재혼을 하지 않으셨다. 갑자기 가장이 되신 엄마였지만, 단 한번도 엄마는 힘들다거나, 외롭다거나 말씀 하지 않으셨다.
주, 야간 일로 본인의 몸을 챙기시기 힘드셨을 테지만, 야간에 들어가는 날에도 꼭 나와 동생의 따끈한 밥은 물론, 냉장고를 열면 한 켠에 봉지 덮인 간식도 빼꼼 있었다.
사랑을 넘치게 표현해주진 않으셨지만, 식탁 위 작은 수첩에는 “딸, 밥 꼭 챙겨먹고 나가”라는 말이 늘 써있었다. 똑같은 말이지만, 또 매 번 쓰셨다.
당시 나는 고3이였다. 아빠와 일여년 정도 살다가 다시 엄마와 살며, 내 마음의 상처만이 제일 깊고 아팠던 때이자, 입시 스트레스로 극도로 예민할 때였기에.. 엄마의 마음을 아주 조금의 순간도 헤아릴 틈이 없었다. 이런 엄마의 사랑과 정성이 너무 당연하다고만 여겼지만, 내가 엄마라는 존재가 되어보니 우리 엄마는 정말 매 순간 엄마로서 최선을 다하고 계셨던 것이었다.
그렇게 늘 묵묵히 살아오시던 엄마가 조금씩 본인의 아픔과 재미를 우리에게 이야기 해주시기 시작한 건, 두가지 사건이 있고부터이다.
하나는 엄마가 재혼을 하신 이후이다. 엄마는 내가 결혼을 하고, 한 달 뒤에 재혼을 하셨다.
우리가 다 자랄 때까지, 엄마의 곱고 예쁜 얼굴이 그저 흔적으로 남을 때까지 재혼을 따로 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홀로 꿋꿋하게 키우셨다.
그랬던 엄마가 재혼을 하시고부터는 너무 사랑스럽고 솔직한 분이 되셨다.
사랑은 세월의 흐름도 모두 덮을 수 있는 듯했다. 엄마의 얼굴에 하나씩 깊어지는 주름살도 엄마의 사랑이 넘치는 미소보다 감히 더 돋보일 수는 없었다.
우리에게 늘 감정을 숨기시고, 혼자 모든 걸 짊어지고 가셨던 엄마는 이제는 자신이 들고 있던 무게들을 자신의 옆사람에게 조금은 나누실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엄마를 옆에서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참 감사함으로 벅찼다.
그리고 또 하나의 사건은... 동전의 양면처럼, 이러한 행복과 대척점에 있는 사건으로, 엄마가 위암에 걸리시고 나서부터이다. 재혼한지 얼마 안되시고 나서 엄마는 위암을 통보 받으셨다. 나는 가족들 중에서도 그 사실을 제일 나중에 알았는데(심지어 우리 남편도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었다.)
그건, 임신한 딸이 알게되어 힘들어하면 안된다는 엄마의 간곡한 부탁때문이었다.
엄마의 수술 날짜가 다가오고 나서야, 나는 엄마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엄마가 재혼하시고, 드디어 자신의 행복을 찾아가신 지 얼마되지 않은터라, 울면서 간곡하게 참 기도를 많이 했다.
“불쌍한 우리 엄마, 이제 자신으로서 행복을 찾아가는데. 우리 엄마를 살려주세
요. 우리엄마 지금 죽으면 억울해서 안되요” 하고...
하늘도 우리엄마의 인생을 꼬옥 안아주고 싶었나보다.
엄마의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안정적으로 몸은 회복되었다.
물론 지금도, 댕강 잘려버린 위 때문에 불편한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엄마는 수술 후 10년 가까이, 잘 이겨내고 즐거이, 그리고 사랑스럽게 살아가고 계신다.
그런 엄마가, 내가 아이를 낳으며 또 자신의 인생을 희생하며 내 아이를 함께 돌봐주고 계심에 내 마음은 늘 무겁다.
엄마의 이야기를 자주 들어주고 함께 시간내서 쇼핑도, 여행도 다니는 친구같은 딸이 되고싶은 마음과는 다르게, 나는 늘 무뚝뚝하고 무심하기 짝이 없다.
누구보다 엄마의 아픔과 상처를 보듬어주고 싶은 마음과는 다르게 ‘툭’하고 말이 나와버리는 멋없는 참으로 아들같은 딸이기도 하다. 그래서 늘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또 그래서 이렇게 글로 밖에 표현할 수 밖에 없는 나다.
“엄마, 내가 표현은 정말 잘 못하지만.. 누구보다 당신의 삶을 온 마음으로 이해해요. 지난 날 당신의 인생을 보듬어주고 안아주고 싶어요.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은 순간에도 우리 손을 꽉 잡고, 이렇게 잘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당신을, 당신의 삶을 존경해요.”
언젠가, 용기를 내서 이 말을 꼭 내 목소리로 들려주는 날이 오길,
그럴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