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캔디의 성장에세이] PART2. 넘어지고 일어서고.
삶에서 다양한 경로로 비집고 들어오는 변수에도 불구하고, 나의 20대는 꽤나 달콤했다.
쓴 맛을 느낄 새도 없이 달콤한 맛의 캔디가 주어졌다.
물론 그 과정 속에서 나름의 보이지 않는 발길질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렇게 힘들게 발길질을 하면,
물 밖에서는 나름의 정직한 성과가 이어지는 것이었다.
또 때론, 정직하다 못해 과분한 행운의 여신의 편애를 받았던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 때나 지금이나 취직난은 매 해, 그 해가 제일 힘들다지만, 한 군데에 지원하고 또 한 방에 되었다.
회사를 나오고 나서도 몇 년은 고생할 각오를 했지만, 6개월도 안되어 회사 월급의 두 배 이상을 벌기 시작했다.
이것이 과연 내 능력만이 해낸 것일까? 20대에는 너무나 그런 줄 알았다.
이 모든 것들이 내가 잘나서라고 생각했다. 고백하자면, 기고만장했다.
그리고 돌아보자면, 어쩌면 이것은 내 인생의 함정이 아니었나 싶다.
취직이 안되어 힘들어하던 친구들의 마음을 진심으로 공감해 주거나 위로해주지 못했다.
꿈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길에서 뜻대로 되지 않아 힘들어하는 친구에게도, ‘네가 더 노력해 봐라’라는 정말 재수 없는(?) 말 밖에 건넬 수가 없는 인간류였다. 경험의 폭만큼 그 사람의 그릇의 깊이가 결정되는 것이라면, 당시 나라는 사람은 실패에 대한 경험 부족으로 다소 비대칭적인 깊이의 그릇이었던 것이다.
변명해 보자면, 또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내 선택의 촉이 좋았는지, 선택하고 추진하는 것마다 많은 수입이 따라주었고 또 내가 움직이는 만큼 누군가가 나의 동태를 보고 있는 양 많은 기회들이 내 손에 쥐어졌다.
내실이 쌓이는 시간, 인고하는 시간 그 어떤 응집의 시간도 없었다.
고작 베트남에서 5년 남짓 살아오며 쌓아온 지식과 경험이, 세상이라는 물결의 흐름 속에서 감사하게도 내게 많은 기회를 던져 주었다.
물론 내가 가만히 있었는데, 기회가 덜컥 온 것은 절대 아니었다. 끊임없이 ‘저 여기 있어요!’라고 세상에 외쳤다. 아르바이트 사이트를 통해 종로의 작은 강의실, 비 오는 날이면 천장 구석 한편에서 빗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그곳에서 두 분의 학습자분과 시작한 강의였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대형학원에 이력서를 마구 던졌고 메가스터디와 같은 대형학원에서 강의를 하기 시작했다. 오프라인보다 온라인이 파급력이 좋겠다 싶어 온라인베이스의 학원에 이력서를 또 마구 던졌다. 어느 정도 기반이 잡히기 전까지는 사실 모두 내가 발로 뛰며, 나를 던지며 얻어낸 기회는 맞다.
하지만, 이것은 누구나 하는 그런 과정 아닌가. 특별할 것은 없던 노력이었다.
겸허히 인정해야 할 것은 그런 기회를 잡는 일이 남들보다는 더 쉽게 더 빠르게 내게 와주었다는 것이다.
내게는 ‘베트남’과 ‘베트남어’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회를 잡아내고 승승장구해내던 나날들. 그게 바로 나의 20대였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20대는 많이 치이며 아프고 또 그 과정 속에서 그 고통 속에서 우리는 제대로 된 자신을 만나고, 인생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해가며 답을 만들어간다.
물론 때로는 그 그 통이 사회의 어떤 부조리한 모순으로부터 기인할 때에는, 분노하기도 하지만.
또 그 분노를 원동력으로, 그 속에서 내 자리와 역할을 찾아가는 과정.
이 과정의 20대를 거쳐, 30대는 비로소 자신만의 어떤 열매를 맺고, 자신만의 깊이가 있는 인생을 찾아가는 것. 아마 그것이 순리가 아닐까.
20대는 어떠한 방황도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용서가 되고, 또 의미가 있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내 인생은 어쩌면 이 순리의 역행이라고 볼 수 있었다.
‘하면 된다’는 식의 인생접근 방법으로, 또 그 논리로 20대를 살아왔고 세상과 사람을 바라봤다.
목표를 이루는 과정 속에서 때론 힘듬이라 말할 수 있는 순간들이 오긴 했지만, 나의 20대에는 좌절이 없었고, 깊은 담금질의 시간이 없었다.
우리네 인생은 사실 소설에 가깝지, 자기 계발서가 아니지 않은가.
문학은 오랜 시간 함께하고, 자기 계발서는 빠르게 소비되듯...
나를 깊이 있게 만들고 긴 호흡으로 인생에서 끌어나가는 것은 결국 소설 같은 희로애락의 호흡 속에 탄생되는, 주인공의 나일 것이다.
고백하자면, 20대의 나는 내 인생도 남의 인생도 그저 자기 계발서적인 관점으로 바라보고 또 접근했다.
그래서 그런 걸까.
내 인생을 더 깊게 만들어주시려고 했는지, 나라는 사람의 찌그러진 그릇을 조금은 평평하고 예쁘게 만들어주고 싶으셨는지.
20대 때 겪어야 할 좌절과 아픔들이 30대에 한 번에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좌절의 순간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속수무책의 나약한 인간 중 하나였다.
때론 나의 의지만으로 이룰 수 없다는 일도 있다는 것, 때론 내 능력의 부족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
때론 내 삶에 대한 의지를 사랑하는 사람의 인생을 위해 조금은 양보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
또 때론 더 큰 기회를 만나기 위해 나를 담금질하며 잘 익혀나가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하나씩 온몸으로 부딪히며 깨달아가고 있는 것이다.
처음 만나는 상황들 속에, 이 늪에 빠져있는 나를 보면 받아들일 수가 없어 참 많이 울었다.
분노하고, 울부짖었다.
내 인생에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순간들을 그래도 조금은 자주 마주쳤더라면 이렇게 큰 좌절은 하지 않았을 텐데. 20대에 아껴놓은 나 자신을 위해 흘려야 하는 눈물을, 30대가 되어 참 많이도 흘렸다.
‘받아들임’이자, ‘겸손’의 눈물.
두 아이의 엄마라는 존재로 살아가며, 20대의 기억된 나를 믿고 호기롭게 시작한 고시의 실패를 겪으며.
또 그 과정 속에서, 사회에서의 그 어떤 영향력이 작고 작아진 나를 만나게 되면서 흘린 눈물.
이러한 시간을 겪는 동안, 내가 이러한 순간들을 마주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덜 아팠더라면, 내가 더 순탄히 갔다면.. 하는 ‘이프’를 매일 수도 없이 내게 던졌다.
하지만, 이 시간의 터널을 안에서, 그렇게 넘어진 나를 때론 부축해 가며 때론 안아주며 데리고 와보니.
‘이프’, 이 시간들이 없었더라면 내 인생은 ‘끔찍했겠다’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터널을 나와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갈수록, 이 시간들이 또 감사하게까지 느껴지는 것이었다.
어쩌면 이 터널 안에서 나는 다시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타인과 세상에 대해서, 나만의 잣대로 함부로 판단했던 나와 자연스럽게 작별하게 되었다.
그 잣대로 말할 수 없는 나의 시간을 겪고 말이다.
또 누군가의 실패와 아픔에 자기 계발서 공식에 대입하여 대답하고 결론을 내던 그 재수 없던, 부끄러운 나도 이제는 없다.
터널 속에 내가 그렇게 툭하면 흘려대던 눈물의 양만큼.
이제는 누군가의 좌절에, 아픔에 그렇게 함께 울어주고 손을 잡아 줄 수 있는 내가 된 것이다.
지금의 나는 20대의 화려하고, 잘 나갔던 나에 비해 조금은 볼품없을 수 있다.
또 누군가가 정해놓은 30대의 인생은 어떠해야 한다는 기준에 다소 엇나가 있을 수도 있다.
사실 내 인생에 이러한 어두운 터널의 시간은 없을 줄 알았다.
이런저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멋지게 고시패스를 한 나로서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턱을 치켜들고
그렇게 자기 계발서의 한 문장 한 문장을 적어 내려 갈 수 있을... 그렇게 대단한 ‘나’만을 그리며 살았다.
이렇게 때론 눈물짓고 또 때론 어느 시간의 구간 속에 있는 움츠린 나를 만나 대화를 나누고 위로해 줄 수 있는 시간이 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또 그렇게 나와 세상에 온기를 담아 글을 써 내려갈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 그릇의 또 다른 결을 만들어내며 진짜 나만의 그릇을 찾아가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무르익어가는 듯한 내 인생, 지금의 한 페이지가 너무도 소중하다.
그렇게 성장 소설의 한 페이지를 써가고 있는 그 소설의 주인공인 나를,
그렇게 달콤한 맛도 쓴 맛도 모두 소중히 여기며 최선을 다해 살아내고 있는 내 인생을… 열렬히 사랑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