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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ulbi Nov 04. 2020

화자의 거리두기

김혜진 ˹동네 사람˼



“너는 잠시 차를 세우고 베이커리에 들를 생각이었다고 한다.” (117쪽)


첫 문장을 읽었을 때, 나는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인 줄 알았다. 한 페이지, 두 페이지를 넘기고서야 비로소 화자의 말투를 의식하고, 여기에 내가 적응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알다시피 화자는 과거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다. 그는 실시간으로 현재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거리감이 느껴진다. 그래서 과거로 착각했던 것이다. 화자는 분명 현재형으로 말하고 있으나, 그가 하는 말은 현장을 전하는 사람의 말이라기엔 생동감이 없달까, 화자의 “심장박동 소리가 거세”(134쪽)지 않다. 꼭 본인이 지금 이 순간을 보고 겪고 있는 게 아니라, 단순히 전해 들은 내용, 혹은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을 그대로 옮기기만 하는 것 같다. ‘너는… 한다.’, ‘너는…라고 말한다.’는 식으로 반복되는 그의 말투가 처음에는 매끄럽게 따라가지지 않는다. 이런 식의 서술은 타인뿐만 아니라 본인의 얘기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나는 너를 끌고 서둘러 자리를 뜬다.” (123쪽)
“나는 오래전, 더 오래전 일들을 들먹거리며 너를 다그친다.” (126쪽)


화자는 이처럼 본인이 하는 말과 행동을 포함,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나열하듯 서술하며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당사자가 아닌 지켜보는 관찰자의 어조를 택하고 있는데, 이는 독자에게 거리감을 유발한다. 화자의 입을 통하지 않으면 그 무엇도 경험할 수 없는 독자에게, 그가 현실에서 한 걸음 물러난 채 관망하듯 상황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장 효과적으로 이야기를 전할 사명이 있는 화자가 왜 이러는 건지 알아야겠다.


“이 동네 사람인가. 큰일이네. 여자 둘이. 저 너머 빌라에. 외지인들이 몰려와서.” (123쪽)
“이상한 사람들.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 (125쪽)
“누가 봐도 너와 나는 나들이 나온 사람이 아닌 것 같다. 그럼 우리는 주민인가.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우리는 잠시 이 동네에 머무르는 사람들이고 그러므로 이도 저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129쪽)
“족보도 없는 저런 상것들” (134쪽)


화자는 그 세계에서 주변인으로 살고 있다. 주민도, 외지인도 아닌 화자의 어중간한 입장. 성소수자이기에 더욱 불리한 그의 입지. 독자가 느끼는 거리감은 화자가 세계로부터 겪는 거리감에서 비롯됐다. 거기다 애초에 화자는 ‘너’가 낸 접촉사고로 인해 원치 않게 할머니를 시작으로 동네 사람들과 엮인 데다,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상황을 키우는 ‘나’까지 신경 써야 하는 처지다. 차를 갖고 나갔다가 문제를 안고 돌아온 ‘나’가 제일 먼저 사과해야 할 사람인 화자에게 그렇게 하지 않은 것과, 마지막에 할머니에게 사과하는 사람이 정작 ‘나’가 아닌 화자인 장면은 묘한 평행을 이룬다. 동네를 거닐며 화자가 만끽했던 자유로움과 편안함은 그대로 끝나고 말았는데,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초월적 화자는 ‘나’가 첫마디를 꺼내는 순간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곧 이 동네에서도 또다시 “불필요한 관심”(135쪽)의 대상으로 전락할 거라는 사실을. 결국 그는 체념한 듯 이 모든 상황과 줄곧 거리를 두기로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렇듯 한발 물러서 관망하는 화자의 태도는 독자에게 효과적인 매개체가 된다. 감정을 누르고 상황 전달에 초점을 둔 화자의 단순한 어조는 작품 전반에서 기능한다. 여러 번 언급되는 관찰자, 또는 주변인으로서의 심상, 거든 것도 없는데 사건의 중심에 서게 된 화자의 부득이한 사정, 진실이 통하지 않는 불합리함, 자유로움을 잃은 화자의 현실, 그래서 어쩌면 이 모든 것으로부터 거리를 둬 차라리 타자화되고 싶은 화자의 심정. 화자의 건조한 말투는 이 모든 것을 포괄적으로 드러내는 의도이자 장치라고 생각한다.


화자를 이해하는 것은 작품을 이해하는 것이다. 화자는 언제나 취지를 가장 잘 전달하는 최적의 언어로 이야기한다. 이 짧은 소설을 읽으면서, 본인의 서사에서 제삼자이고 싶었던 일인칭 화자의 심정을 헤아려보았다.





김혜진, 「동네 사람」, 『작별-2018년 제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은행나무,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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