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집에서 철수의 짐이 다 빠졌다. 우리가 사귀는 동안 자연스레 집에는 그의 물건들이 늘어갔다. 옷, 책, 양말, 신발, 키보드, 여행용 캐리어, 바이올린, 캠핑의자…… 이제 헤어졌으니 그가 내 집에 있던 자기 짐들을 챙겨간 것이다. 자질구레한 물건이 가득 든 쇼핑백을 안고 멀어지는 철수의 뒷모습을 보고 그제야 실감이 났다. ‘이제 어쩌지’.
헤어지자고 말한 게 한 달쯤 전이다. 그동안은 그가 빨리 좀 자기 물건들을 치워줬으면 했다. 그래야 나도 살 것 같았다. 철수의 물건 없이, 흔적 없이, 나도 좀 생각이란 걸 할 수 있게 집에 여백이 있길 바랐다. 그의 물건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는 집에서는 그것들이 안 보이는 척하는 데 힘을 다 써버려서 그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런데 마침내 그가 자기 물건들을 안고 멀어지는 모습을 볼 때 내가 느낀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후련함일까, 허무함일까.
철수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집에 들어왔다. 집은 여전히 어수선했고, 텅 비어 보였다. 갑자기 울컥했다. 식탁에 앉아 눈물이 터지길 기다렸다. 그런데 싱크대에 둔 음식물 쓰레기봉투 주변으로 날파리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울려던 마음을 접고 음식물쓰레기를 내다버리고 왔다.
청승 떨 바에야 청소를 해야지 싶어서 작은방으로 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천 조각을 집어 든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손바닥만 한 바퀴벌레가 그 밑에 있었다. 도대체 이건 또 뭘까. 우리 집에는 일 년에 두어 번, 커다란 바퀴벌레가 출몰하곤 하는데 이렇게 큰 애는 처음이었다. 더듬이가 거의 내 검지만큼 길었다.
그동안 바퀴를 잡는 건 철수가 해왔다. 집에 혼자 있을 때 바퀴가 나오면 철수에게 전화했고 그가 한 시간 안에 와서 잡아줬다. 그 정도로 바퀴 앞에서 나는 전혀 쓸모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그런데 하필 지금, 철수가 가자마자, 이제 다시 오지도 않을 그가 떠나기 무섭게 이렇게 거대한 바퀴가 나온다고? 대체 나한테 왜 이래.
그런데 상태가 팔팔해 보이지 않았다. 천 조각과 함께 들어 올려지려다 다시 바닥에 떨구어졌는데 움직임이 없었고 더듬이만 미세하게 좌우로 움찔거렸다. 거의 죽기 직전인 듯했다. 미안하지만 나에겐 불행 중 다행이었다. 나는 겨우 그 바퀴를 처리하는 데 성공하고 한숨 돌렸다. (다 설명하려면 길다)
밤에는 꼭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사들였다. 그릇, 주방 칼, 캡슐 커피 머신, 냄비, 볶음팬, 휴지 케이스, 인덕션…… 다 더해보니 대략 65만 원어치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나 괜찮은 걸까. 그냥 텅 빈 집에서 헛헛할 걸 그랬나.
철수와 헤어져야 한다는 걸 머리로 안 지는 적어도 일 년이 넘었다. 다만 그걸 받아들이고 실행하기까지 오래 걸렸다. 철수와 함께 늙어가는 상상을 했는데, 흰머리가 되어서도 손잡고 걷는 우리를 그려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헤어진다.
우리는 실패한 걸까? 나는 실패하기 싫었을까, 실패한 걸로 보이기가 싫었을까. 사실은 내가 먼저 철수를 떠나야 한다는 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거. 그러지 못하는 동안 나는 이십 대에서 삼십 대가 되었다는 거. 이렇게 짧게 요약되는 거. 여전히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모르겠다.
그런데 이 글을 쓰면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어쩌면 나는 헤어지는 데 성공한 것이다. 철수도 마찬가지로, 나와 헤어지는 데 성공했다. 우리는 오래 걸렸지만 성공적으로 헤어졌다.
철수가 지워진 집에서 어떻게 살아갈지, *그 방법을 계속 찾으며 살아가겠다.
2024.08.12
*이랑, 『대체 뭐하자는 인간이지 싶었다』, 달 출판사, 2016년 2월 28일(1판 3쇄), 3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