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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영돈 코치 Feb 05. 2020

죽을 때까지 글쓰기를 놓지 마라!

율리시스 심슨 그랜트 미국 18대 대통령 이야기

 글을 잘 쓰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얻는다. 글을 잘 쓰는 것은 스토리라인을 만들 줄 안다는 말이다. 글을 잘 쓰는 것은 단순히 기술이 아니다. 글이 곧 길을 낸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글을 쓸 수 있다. 인간의 나약함도 글을 쓰는 순간 길이 내는 순간을 자주 본다. 말은 공들여하기 어렵지만, 글은 여러 번 공을 들여서 수정하기 쉽다. 글은 처음 누구나 알아듣기 힘든 초짜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글은 시간을 투자해서 오래 쓸수록 자신만의 문체를 찾는다.

 미국의 50달러 화폐 주인공은 누구인지 아는가?  

 미국의 18대 대통령 '율리스 심슨 그랜트(Ulysses Simpson Grant)'이다. 그는  오하이오에서 가죽 가공업자 '제시 그랜트'와 농장주 집안 출신 '한나 심슨'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는 말수가 적고 혼자 노는 걸 좋아할 정도로 내성적이었지만 글을 쓰기를 좋아했다. 원래 본명은 침례회에서 받은 세례명을 붙인 '하이럼 율리시스(Hiram Ulysses)'이다. 웨스트포인트에 입학하면서 사관학교 입학을 위해 추천서를 받은 지역 연방 상원의원이 추천서에 이름을 '율리시스 심슨'으로 잘못 기재한 것이다. 하지만 한 번 기재된 이름을 고치려면 굉장히 번거로웠기 때문에 그는 할 수 없이 잘못 적힌 이름으로 개명했다. 개명한  'U. S. 그랜트'가 'H. S. 그랜트'보다 대통령 출마했을 때 자신을 알리는 것에 더 유용했다고 한다. 자그마한 실수가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것이다.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

 그는 초급장교로 임관된 후 늦은 진급과 낮은 급여 때문에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20~30달러의 빠듯한 월급으로 살림을 이어나가는 것이 절망스러웠다. 그가 근무한 서부는 아무것도 없는 척박한 오지라서 돈을 가져와도 물건이 없어서 구입이 불가능할 수준이었다. 진급 가능성마저 낮던 그는 근무지인 서부에서 대위 계급으로 경리장교 임무를 수행하였으나 가족과 떨어지고 서부의 열악함 때문에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이 더 심해진다. 대낮에도 술에 취해서 금화 개수조차 제대로 셀 수 없는 지경까지 오게 되었고 결국 그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처벌받을 것인지 퇴역할 것인지의 갈림길 앞에 선다. 더 이상 군인으로 생활하기 힘들었던 그는 퇴역을 선택한다.


쓸모없는 추한 중년이 되다.
갈 곳이 없어진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아버지가 운영하는 가죽제품 공장에서 경리로 일하게 되지만 그 일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원래 그는 일반대학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막대한 대학 등록금은 감당하기 힘들어 사관학교로 간다. 이미 자신이 군인 체질이 아님을 알고 있었고 실제로 전투 임무를 제외하고는 군사 업무를 제대로 수행한 적이 없다. 심지어 행군도 엉망이어서 행군을 위한 군악도 몰랐다. 게다가 성격도 내성적이어서 상관과 동료에게 인기가 없었고 외향적인 성격이 적응하기 쉬운 군대는 그에게 힘들고 외로운 장소였다. 결국 아버지는 그랜트가 이 모양이 된 것에 자신의 책임이 크다고 느껴서 무능하지만 일을 맡긴 것이다. 아버지 덕분에 제대로 된 직업을 가졌지만 그랜트는 고향에서 그저 볼품없는 주정뱅이 중년이었다. 같은 동네의 아마추어 정치평론가인 친구와 토론을 할 수준인 것을 제외하면 유능한 구석이 하나도 없는 추한 중년으로 동네 사람들에게 멸시받았다.

한번 믿었으면 끝까지 지지하여 사람을 남겨라.

남북전쟁이 시작되자 그랜트는 일리노이 의용군에 지원하고 군사 경력이 인정되어 일리노이 의용군 대령으로 임관된 후 몇 달 지나지 않아 연방군 준장으로 진급한다. 그랜트의 전술적 능력은 매우 뛰어나 서부 전역의 남부 요새인 포트 헨리, 포트 도널슨을 함락시키며 전장을 테네시로 밀어붙였고, 빅스버그 포위전에서는 남군의 빅스버그 지원 시도를 적절히 차단하며 천혜의 요충지 빅스버그를 포위하여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빅스버그 함락 이후에는 치카무가 전투의 패배로 위기에 빠진 테네시의 연방군을 채터누가에서 구원하는 데 성공했고, 1864년에는 마침내 미 육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된다. 이후 서부전선을 자신의 오른팔 윌리엄 테쿰세 셔먼에게 맡기고 자신은 동부전선 주력인 포토맥군에 종군하며 직접 통제, 남군의 대표적인 명장인 로버트 E. 리와 격돌하여 그의 항복을 받아내서 전쟁을 종결시켰다. 전쟁 중 인명피해는 북군이 더 많아서 의회에서는 그랜트는 이제 안 된다고 밀어붙였으나 에이브러햄 링컨이 그랜트를 전폭 지지하여 계속 활약할 수 있었다.

단점보다 장점으로 사람을 써라.
남북전쟁 초기에는 전세가 북군보다 오히려 남군 쪽이 더 우세했다. 특별히 당시 남군사령관이었던 로버트 리 장군은 강점을 근거로 부하장군들을 선발했다. 결과는 남군의 연전연승이었다. 그 당시 리 장군을 상대했던 북군의 사령관은 자칭 나폴레옹이라고 떠들던 맥클레인 장군이었다. 하지만 맥클레인은 자신감을 잃은 체 끌려 다니는 한심한 인물이었다. 이후 북군에서는 맥클레인 장군 후임으로 후커, 미드 등이 총사령관을 이어받았지만 리 장군에게 연전연패하여 퇴역했다. 이 당시 링컨이 사령관을 뽑는 기준은 장점보다 단점이 없는 인물을 사령관으로 임명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택한 인물이 바로 로버트 리 장군의 사관학교 동기이기도 한 율리시스 그랜트 장군이었다. 그는 153cm의 단신으로 볼품도 없고 누구에게도 주목받지 못한 실패한 군인이자 술주정꾼으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그것은 장군으로서 큰 단점이었다. 하지만 비록 소규모 전투였지만 그가 참전하는 전투에서는 연전연승하였다. 분명히 그랜트 장군은 흠이 많은 인물이었지만 링컨은 그의 강점을 높이 사서 일약 그를 북군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결국 링컨은 단점으로 사람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장점으로 사람을 선택한 것이다. 그랜트가 아니었다면 링컨은 미합중국을 구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18644, 링컨이 피격된 후 앤드루 존슨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였다. 하지만, 존슨이 의회의 탄핵을 받음에 따라 당시 여당인 공화당은 그랜트를 영입하였고, 1868년 선거에서 제18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마크 트웨인이 무명 작가인 시기에 상원의원인 친구의 소개로 대통령직에 갓 취임한 상태의 그랜트와 만난 적이 있었다. 당시 마크 트웨인은 상대가 대통령인데다 그랜트의 무뚝뚝한 대응에 지나치게 긴장해서 "어... 참으로 당황스럽네요." 하며 제대로 인사를 하지 못했다. 이후 1879년 그랜트가 해외 순방을 마치고 귀국하는 것을 환영하는 시카고의 행사장에서 다시 마크 트웨인과 그랜트가 만나게 되었는데, 인사 대신 그랜트가 한 말은 "저는 당황스럽지가 않는데, 지금 당신은 어떤가요?"였다. 마크 트웨인의 말을 기억하고 있다가 그대로 말해 놀려먹는다. 그래서 마크 트웨인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를 언급하면서 그랜트가 상당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대통령 재임 기간 중 정부 각료들의 공공연한 뇌물사건 등으로 전쟁영웅으로서의 이미지는 퇴색하고 인기는 바닥을 쳤으나, 1872년 선거에서 재선 되어 미국 국민들조차 의아하게 여길 정도였다. 이런 탓으로 그랜트는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 1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가족을 위해 필사적으로 썼다.

말년에는 친구 퍼디낸드 워드의 중개회사 보증을 잘못 서서 파산했다. 자신은 이름만 빌려준 일종의 피라미드 사기에 당했다고. 그래도 사람이 너무 좋은 나머지 자신의 이름만 믿고 돈을 빌려준 사람들에게 돈을 갚기 위해 자신의 집을 포함한 전 재산을 처분하려고까지 했으나, 절친한 친구이자 전 대통령인 그랜트가 집마저 없는 빈털터리가 되지 않길 원했던 채권자의 거절로 흐지부지되었다고 한다. 이에 빚을 갚기 위해 작가이자 친구인 마크 트웨인을 고용해서 회고록을 집필한다. 생활비가 떨어져서 자신이 가진 모든 군 경력 및 대통령 시절의 기념품을 저당 잡혀 돈을 빌려 생활하며 필사적으로 회고록을 썼다. 문제는 이때 후두암으로 거의 치사량에 가까운 아편을 먹어가면서 고통을 참아가며 회고록을 구술했다. 문학적으로 남북전쟁 전반에 대해 다룬 꽤 괜찮은 회고록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남북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생존자의 회고록이었기 때문에 굉장히 잘 팔렸다. 결국 회고록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50만 달러나 벌어들여 빚을 갚고 유족들을 돈방석에 올려주었다고 한다. 본인이 사망한 후에. 실제로 그랜트는 초고 완성 4일 전에 사망했다. 초고 수정과 출판 감독은 그랜트의 부인이 했고 최종적으로 마크 트웨인이 완성한다.

 마크 트웨인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 회고록이 출판되기까지의 과정을 간략히 소개한 바 있는데, 그랜트는 파산하기 이전, 한참 사회적으로 활발히 활동하던 시기부터 회고록을 써 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아왔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자신은 작가가 아니기 때문에 제대로 된 글을 쓰지 못할 것이다'라는 이유로 거절했다는 것. 그런데 이후 사업 실패로 파산하여 생활비조차 마련하기 힘든 처지가 되자 호구지책 삼아 몇몇 신문사에 짧은 글을 기고하기 시작했고, 크게 힘들이지 않고 쓸 수 있는 짧은 글로 생각보다 좋은 원고료를 받을 수 있었던 것에 만족하여 본격적으로 회고록을 쓰려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인세 15%를 조건으로 출판사와 계약을 준비하던 상황에서 마크 트웨인이 갑자기 끼어들어 '그랜트 장군이 받을 인세가 너무 적다' 고 주장하며 해당 출판사와 계약하지 말라고 그랜트를 설득하기 시작한 것. 그렇다면 어느 정도의 인세가 적당하겠느냐는 그랜트의 질문에 대한 마크 트웨인의 대답은 '75% 인세에 출판 및 홍보 비용까지 모두 출판사가 부담해야 하며, 이 경우 출판사는 큰 수익을 기대하기는 힘들겠지만 그랜트의 회고록을 출판함으로써 얻어지는 출판사의 명망 상승을 생각하면 공정한 거래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대답을 들은 그랜트는 마크 트웨인을 안쓰럽다는 눈으로 바라보며 최대한 마크 트웨인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자네는 뛰어난 작가지만 사업가로서는 좀 지나치게 몽상적인 것 같다' 고 타이르기 위해 고민하는 표정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마크 트웨인의 거듭된 설득에 마음이 움직인 그랜트는 아들에게 '원고를 클레멘스(마크 트웨인)에게 주겠다' 고 이야기했고, 마크 트웨인은 원래 이 원고를 자신의 책을 출판하던 출판사에 가져갈 생각이었지만, 안 그래도 원고료 문제로 출판사와 감정이 심하게 상해있던 상태라 '지금까지 내 등을 실컷 쳤던 출판사 놈들에게 그랜트의 등까지 치게 해 줄 필요는 없다'라고 판단, 직접 출판사를 차려 그랜트의 회고록을 출판하기로 결심한다. 마크 트웨인이 그랜트에게 약속한 것은 '원고를 내게 넘겨주면 돈방석에 앉혀주겠다'는 것이었고, 실제로 그 약속을 제대로 지켜 그랜트의 유족을 돈방석에 앉혀주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마크 트웨인이나 율리시스 그랜트처럼 순수하게 '책을 팔아서' 큰돈을 번 사람들이 나타났다는 것은 당시 미국 사회의 경제적 급성장을 통해 '소비 여력이 있는 시민계층'이 충분한 규모로 형성되기 시작하였으며, 인구 밀도가 낮은 미국 사회에서 이들 중산층이 비교적 쉽고 저렴하게 접할 수 있는 문화상품으로써 '책'이 각광받기 시작하면서 산업 영역으로써의 출판시장이 자리 잡았다. 또한, 마크 트웨인이 그랜트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본래 그랜트의 회고록을 출판하려던 출판사가 소매 출판 전문 회사임을 지적하고 '그랜트 같은 유명인의 회고록은 소매 출판보다는 예약 출판으로 출판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라고 주장했던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출판 시장이 산업화되면서 판매 형태 역시 고도화되기 시작했다.


전투를 앞둔 장수에게 보내는 그의 메시지는 명쾌하고 용기를 북돋우는 걸작이다. 사실 파산한 그를 살려낸 것은 바로 그동안 닦아놓은 글솜씨 덕분이다. 집필에 전념한 그는 탈고 4일 만에 숨을 거두었지만 그 회고록이 무려 당대에 50만 부나 팔리면서 유족이 빚더미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전쟁터나 학교, 직장에서 글쓰기 능력은 살아남는 중요한 무기가 된다. 전쟁영웅, 알코올 중독자, 최악의 대통령, 타고난 문장가 등 굴곡진 삶을 살았던 그는 1913년부터 50달러 지폐의 모델을 맡고 있다.  율리시스 심슨 그랜트 미국 18대 대통령은 죽을 때까지 글을 써서 가족을 살려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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