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무다. 언제부터 이 자리에 있었는지 모르지만, 처음 내가 이 풍경을 본 것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아주 오래도록 이 자리에 서 있었다. 아주 가끔 이곳을 지나가는 인간들의 말로, ‘산세가 험하고 높기는 높아서 웬만한 등산객은 엄두를 내지 못하는 곳’이라고 했다. 그러다 보니 이곳에서 인간을 보기란 매우 드문 일이었는데, 며칠(심지어는 몇 달까지) 만에 지나가는 인간들을 볼 때면, 나는 제법 그들이 귀엽고 재미있어 온종일 행복했다.
이제는 날이 꽤 추워져 이곳을 찾아오는 인간들이 너무 적어졌다. 몇 번의 낮과 몇 번의 밤이 지났지만 멀리서 인간의 발에 밟히는 나뭇잎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내 유일한 즐거움인 인간 구경도, 이 계절엔 말라버린 계곡의 물소리를 듣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게 며칠이나 더 지났을까. 쌩쌩 부는 바람 소리만 가득했던 이곳에 바람보다 더 차가운 표정의 여자 인간이 나타났다. 체력이 좋은 남자 인간도 씩씩거리며 올라오는 곳에 갑자기 찾아온 그 여자 인간은 작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발에 밟히는 나뭇잎 소리가 아니었다면 존재감을 전혀 느끼지 못할 뻔한 그 여자 인간은 깎아지른 절벽 앞에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다시 내려갔다. 바로 옆에 아무 말 없이 서 있을 수밖에 없던 나는 혹여나 그 여자 인간이 절벽 아래로 곤두박질칠까 봐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모른다. 그렇게 그녀가 사라진 뒤 나는 다른 인간이 나타날 때까지 그날, 그녀가 서 있던 그 모습을 내내 다시금 떠올렸다. 나무인 내가 보기에도 얼음장같이 차갑고 텅 빈 그녀의 표정이 잊히지 않았다.
그 후로 몇 주가 지나고 대여섯 명의 인간들이 이곳을 찾고 나서야 다시 그녀를 볼 수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기 시작해 하늘이 붉게 물든 시간에 나타난 그녀는 여전히 차가웠고, 뭐랄까, 나처럼(그러니까 움직이지 못하는 나무처럼) 무기력해 보였다. 이번에도 절벽 앞에 한참을 서 있던 그녀는 불현듯 고개를 돌려 이곳저곳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나에게 시선이 멈췄다. 조용조용 내게로 걸어온 그녀가 조심스레 내게 등을 기대어 쭈그리고 앉았다. 나는 곧이어 뿌리 근처에서 살짝 느껴지는 떨림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울고 있었다. 지금까지 인간을 보면 마냥 행복하던 나는 그녀의 떨림을 느낀 후로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마치 나의 껍질 한 겹 한 겹이 벗겨지는 고통이었다.
노을이 지고 깜깜한 어둠이 내려앉을 때까지 울던 그녀는 앞을 보기 힘든 한밤중이 되어서야 사라졌다. 나는 오늘도 절벽 아래가 아닌 산길을 따라 내려간 사실에 감사하며 뿌리 가까이 느껴진 떨림을 기억했다. 떨리는 어깨를 감싸안아 주고 싶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오늘처럼 내가 인간이 아닌 나무라는 사실이 사무치게 싫었던 날이 없었다.
또다시 며칠이 지났다. 이제 더 이상 인간들이 찾아와도 기쁘지 않았다. 온종일 그녀가 생각났고, 그날 그녀의 떨림이 생각났다. 그녀가 다시 찾아오길 바라면서 그녀가 다시 찾아오지 않길 바랐다. 그녀가 이곳을 다시 찾아오는 그날이, 왠지 그녀의 마지막이 될 것 같다는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그렇게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를 며칠, 결국 그녀가 이곳에 다시 나타났다. 칼바람이 살을 에는 추위에도 목도리 하나, 장갑 한 짝 끼지 않은 채였다.
그녀는 곧바로 내 앞에 기대앉아 한참 동안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나는 그녀에게 나의 이야기가 전달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오늘도 산길을 따라 안전하게 내려가기를 바랐다. 그렇게 그녀에게 내 마음을 수십 번쯤 외쳤을 때, 그녀가 조용히 일어났다. 나는 내가 존재해 온 모든 날 중 제일 간절하게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다른 날과 다르게 묵직해 보이는 걸음걸이로 산길이 아닌 절벽 앞으로 다가섰다. ‘그쪽이 아니야!’ 나는 그녀를 향해 내 몸이 부서질 듯 외쳤지만, 나의 간절함이 무색하게 순식간에 절벽 아래로 사라져 버렸다.
그녀를 붙잡고 싶었지만 붙잡을 수 없었다. 뒤이어 뛰고 싶었지만 뛸 수 없었다. 소리를 지를 수도, 눈물을 흘릴 수도 없었다. 깊이 박힌 뿌리는 내 의지로 거둘 수 없고, 길게 뻗은 가지는 절벽 아래로 내릴 수 없었다. 나무라는 존재는 이토록 무능력한 것이구나. 지금 내가 느끼는 것이 분노인지, 슬픔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렇게 처절한 하루가 지나고 계절이 바뀌어 새싹이 움트는 봄이 찾아왔다. 그녀를 잃은 후로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 갈가리 찢기고 부서졌으나 사실 그건 그저 내 마음일 뿐이었다. 나에게도 새로운 계절은 어쩔 수 없이 찾아왔고, 나의 가지에는 초록의 새싹이 돋았다. 내내 겨울인 나의 봄과 여름, 가을이 지나고 다시 겨울이 찾아오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