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니펙 리츄얼 - 의사 만나기

by 윤도

6년 만에 다시 온 위니펙이다.

유난히 추운 곳이다. 처음 오는 이민자들은 센트룸 같은 보조식품을 챙겨 먹으라는 권고를 먼저 온 한국사람에게서 꼭 받는다. 이민 생활하면 꼭 한 번씩 앓는데 그나마 영양제를 먹으면 수월하게 이겨낼 수 있다고 하면서. 나도 십여 년 전 처음 위니펙에 왔을 때 그런 것을 안 먹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 같아 센트룸은 물론이고 로열제리에 글루코사민까지 코스트코에서 구입해 꼬박꼬박 챙겨 먹었던 기억이 있다. 덕분에 첫 해 겨울엔 감기 한번 안 걸리고 보낼 수 있었다.


올 겨울에 몇 년 만에 다시 위니펙에 자리 잡으면서 나는 무슨 배짱으로 근 흔한 비타민C 도 안 먹었던 걸까. 게다가 이곳은 한국처럼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게 자연스럽지 않아서(코로나에 그렇게 당하고서도 말이다) 코와 입을 거침없이 들어내고 이곳저곳을 다녔으니, 감기에 걸린 건 너무나 당연했다.

그런데 문제는 감기 증상이 도무지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거였다. 가벼운 두통을 동반한 콧물과 재채기로 시작했을 땐 가벼운 감기인가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목이 따갑거나 열이 없는 걸로 봐서는 독감은 아닌 듯싶었다. 그래도 초기에 잡자 싶어서 약국에서 산 베닐린 Benylin 이란 감기약을 복용했다. 약을 복용하며 한 이틀정도는 증상이 좋아졌다 나빠졌다를 반복하더니 결국은 열과 오한이 나며 가래 기침이 나기 시작했다. 기침은 한번 시작하면 조절이 안되어서 숙면을 취하기도 어려웠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 고생하고 나서야 의사를 만나야 할 결심이 섰다.


캐나다에서 의사를 만나려면 일단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주치의가 있는 경우엔 클리닉에 전화나 인터넷으로 예약을 잡을 수 있다. 주치의가 없는 경우에는 워크인 클리닉 walk-in-clinic, 말 그대로 예약 없이 클리닉에 가서 접수해 놓고 기다리면 된다. 감기 환자가 많은 시기에는 한 시간도 넘게 기다리기도 한다. 나는 주치의가 있으므로 예약을 하려고 클리닉에 전화했다. 예상대로 의사를 가장 빨리 만날 수 있는 날은 2주 정도 뒤였다. 내가 망설이자 전화기 너머로 접수원은 2주가 너무 길다면 워크인으로 오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직장 일이 10시부터 시작이라 여유도 없었지만 세균이나 바이러스를 내뿜는 환자들 사이에서 한 시간 정도를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하니 내키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2주 후면 분명 다 나으리라는 생각에 예약 없이 전화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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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상은 좋아지지 않았다. 열이나 오한은 없어졌지만 기침이 잦아지고 가래가 심해졌다. 직업상 말을 많이 해서인지 증상은 오후 즈음엔 더 심해져서 허리가 반으로 접히며 기침을 해댔다. 나 자신도 괴로웠지만 주위사람도 편한 시선은 아니었다.

"그래도 의사를 만나는 게 낫지 않겠어?" 지인이 말했다.

"그렇잖아도 전화했더니 2주 걸린다잖아. 그때 되면 낫겠지 하고 말았더니."

"그랬구나. 아무튼 여기 시스템 문제 있어. 공짜면 뭐 해. 필요할 때 못 보는데. 의사 만날 때 즈음이면 다 낫는다니까." 지인이 투덜댔다.

맞는 말이다. 캐나다 의료비는 무료인 대신 기다려야 한다. 만약 암 환자가 치료받기 위해서 수개월을 기다려야 한다면 어떻게 될까. 분명 기다리다 죽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많은 한국인들은 기다리느니 한국행을 택하기도 한다.


다시 클리닉으로 전화를 해 2 주 후로 예약을 잡았다. 사실 의사를 만난다 하더라도 별 뾰족한 수는 없다. 항생제나 소염진통제 같은 약을 처방해 주는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진통제 사 먹으라고 권고하는 것 밖에는. 하지만 이렇게 까지 오랫동안 기침을 한 적은 없었기에 걱정이 되었다. 게다다 폐암 가족력이 있는데 혹시 올 것이 오는 건가라는 암울한 생각도 들었다. 의사 만날 때 즈음이면 다 낫는다며 의료 시스템을 타박할 때 하더라도 제발 낫기만 한다면 좋겠다고 속으로 바랬다.

닥터스 오피스


2 주 후 주치의를 만날 땐 상당히 좋아지긴 했다. 의사는 문진을 끝내고 청진기로 폐소리를 한참 들었다.

"벌써 한 달째예요. 아직까지도 가래가 나온다니까요. 아시잖아요. 저희 아빠 폐암으로 돌아가신 거." 심호흡을 끝낸 나는 징징댔다.

"폐 소리는 괜찮아요. 가래 나오는 건 두 달 정도 걸릴 수도 있어요. 요즘 감기 오래 가요"

의사는 혈액 검사와 폐 엑스레이 주문서를 주며 일주일 후에 다시 오라고 했다.


주 중의 한 날을 잡아 오전 7시 30분에 집에서 8분 정도 걸려 혈액 검사하는 랩 Labratory으로 갔다. 예약 없이 워크인으로 왔더니 내 앞에 23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랩은 7시 30분에 문을 여는데 이 사람들은 도대체 몇 시부터 왔던 걸까 의아했다. 20 여 분 정도 기다려 피를 뽑고 난 후, 엑스레이를 찍으러 근처의 래디올로지 Radiology로 갔다. 다행히 대기자가 없어서 바로 찍고 제시간에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혈액 검사와 엑스레이 검사 결과를 들으러 의사를 다시 만났다. 다행히 별 이상이 없었다. 만약 여기서 이상이 있다면 주치의는 전문의에게 환자를 보낸다. 물론 그런 경우에는 주치의 만나는 것보다 더 오래 기다려야 한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수개월을 기다리기도 한다. 수년 전 5개월을 기다렸다 어깨 MRI를 찍었던 기억이 난다.


감기를 무시할 수 없는 나이가 된 거다. 거의 두 달을 감기 환자로 보내고 나니 초 여름의 햇살이 더욱 싱그럽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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