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까맣게 잊고 있었다.
늦은 아침 식사로 허리글 채우느라 젓가락질을 반복하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엘의 얼굴이 핸드폰 화면에 나타났다. 엘은 여간해서 교회를 빠지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지금 일요일 오전 11시 반에 엘의 전화는 매우 드문 일이라 생각하며 윤조는 음식물을 삼키고 전화를 받았다.
"응, 언니."
"나, 있잖아."
진지한 엘의 목소리에 윤조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그때 그 북엇국"
"북엇국?"
'으응. 나, 그거, 너무 먹고 싶어."
정말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니 잊으려 애를 썼었다.
지난 시월, 엘과 한국에서 먹었던 북엇국은 난생처음으로 먹어본 기가 막힌 맛이었다. 겨우 북어로 그렇게 깊은 맛을 낸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큼직한 스텐 국그릇에 담긴 뽀얀 국물, 송송 썬 대파와 잘 풀어진 달걀, 그 사이이로 유영하는 참기름 몇 방울을 떠올리자 그동안 억눌러 왔던 식탐이 단박에 몰려왔다.
"너무 생뚱맞지?"
풀 죽은 엘이 윤조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윤조는 식탁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케아에서 산 흰색 무지 접시에 막 먹다 남은 음식이 눈에 들어왔다. 퍽퍽한 돼지살코기에 엉긴 피망과 숙주. 군데군데 붙은 쌀밥. 아무리 전날 남은 음식을 데웠다 하더라도 플레이팅이라도 제대로 했어야 했다.
"아냐, 생뚱맞긴. 언니가 그러니까 갑자기 나도 먹고 싶네."
윤조가 접시를 슬쩍 밀쳐내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북엇국을 떠올린 이상 그런 정체불명의 음식엔 더 이상 손이 갈 것 같지 않았다.
"그치? 자기도 먹고 싶지? 그 맛 나게 끓일 수 있어? 우리 한번 끓여볼까?"
엘의 목소리가 들떴다.
북엇국이라면 한국에서 결혼 생활을 하며 수도 없이 끓였던 메뉴 중 하나였다. 일 년에 두 번의 제사와 구정과 추석을 지내면서 쌓이는 북어포는 언제나 처치 곤란의 대상이었다. 북어 대가리를 분리해 껍질을 몸통에서 쭉 잡아당겨 따로 빼놓고 몸통살을 일일이 찢고 나면 아무리 비닐장갑을 꼈더라도 손가락 한 두 군데는 꼭 가시에 찔리기 마련이었다. 북어 대가리와 껍질까지 넣고 무와 두부를 썰어 끓여낸 북엇국은 양이 상당해서 얼마동안 냉장고 한편에 자리하곤 했었다. 윤조는 북어의 그 밋밋한 냄새를 좋아하지 않았고 아이들도 이상하게 다른 국은 잘 먹어도 북엇국은 먹지 않았다. 결국 북엇국을 먹는 사람은 전 남편뿐이었고 다시 끓여내길 반복한 국은 끝내 간이 세지고 두부와 무는 물러져서 버리게 되곤 했었다.
"나 있지. 며칠 동안 밥도 제대로 못 먹었어."
도로 풀 죽은 엘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짜?"
"응. 그 북엇국 생각뿐이야. 정말 가깝기만 하다면 당장이라도 가겠어."
하루 두 끼를 의식을 치르듯 좋은 재료로 정성 들여 만들어 먹곤 하던 엘이 갑자기 북엇국 말곤 식욕이 없어져 끼니를 거르다 급기야 교회까지 빠졌다고 생각하니 문득 우동 한 끼 먹으러 인천-오사카행을 오른다는 사람들이 십분 이해되었다.
"아이고, 그랬어? 다음에 갈 땐 무교동으로 바로 가야겠네."
그때 엘과 윤조는 한국을 방문했던 시기가 맞았다. 캐나다로 돌아오기 전 서울 시내에서 2박 3일을 묵었다. 시내 맛집 탐방과 서울시티버스투어가 주목적이었으므로 4호선 충무로 역 앞의 숙소를 잡았다. 그날 저녁과 다음날 아침 메뉴를 정하려 핸드폰 검색을 했을 때 도보 거리에 있는 무교동 북엇국집이 눈에 들어왔는데 리뷰가 상당히 좋았다. 신기하게도 윤조는 리뷰에 북엇국과 직접 담근 듯한 김치 사진을 보자 좋아하지도 않던 북엇국이 몹시 먹고 싶어졌다.
"언니! 군산 언니가 보내 준 참기름 아직 있어?"
윤조가 핸드폰을 귀와 목사이에 끼우고 주방 찬장의 양념칸을 둘러보며 물었다.
"응. 아직 한 병 그대로 남았는 걸."
군산에 사는 엘의 언니가 농사 지어 짠 참기름을 떠올리자 군침이 돌았다. 한국마트에서 산 기성품의 느끼한 것 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그 향.
"그럼 북어하고 무만 사면 되겠네. 한번 끓여보자!"
윤조가 결심한 듯 말했다.
"정말? 그럼 바로 서울 마트 가볼까? 내가 데리러 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