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불멍 할까?"
"하하. 언니도 불멍이란 단어를 쓰네."
국이 끓는 동안 벽난로 앞에 앉아 불멍 할 짬이 생겼다. 둘은 벽난로 앞에 이 인용 카우치를 끌어당겼다.
"세상에, 저 하늘 좀 봐.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지겠어."
엘이 카우치 한편에 바짝 앉으며 말했다.
부쩍 기분이 날씨에 영향을 많이 받는 게 나이가 들면서인지 위니펙 생활을 오래 하면서인지는 몰라도 분명한 건 이런 날 혼자 집에 있었더라면 마냥 우울했을 거란 거였다. 강렬한 주홍색의 장작불이 온몸을 감쌈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음침한 기억은 윤조의 의지와 상관없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왔다.
"그러게, 어쩜 저렇게 칙칙할까. 오늘 우울한 사람들 많겠어."
한 번은 윤조가 남은 북엇국을 버리는 것을 전남편이 목격했다. 아무도 안 먹으니 쉬었지 뭐야 하며 머쓱하게 그녀가 말했고, 맛이 없으니 안 먹는 것 아니겠냐고 그는 비아냥댔다. 그 일그러진 표정이 불쑥 나타나 장작불위에서 더 비틀렸다.
"불 색깔, 참 이쁘지?"
"응. 참 이쁘다."
윤조가 글을 읽듯 겨우 대꾸했다. 지랄 맞은 생각들은 매듭 풀린 털실 마냥 계속 이어졌다. 그녀는 품 안에서 상상의 가위를 꺼냈다. 싹둑. 싹둑싹둑. 효과가 없었다. 하도 많이 써서 닳기도 했겠다.
타닥. 탁탁. 툭탁. 장작불 타는 소리에 윤조가 정신을 차렸다. 엘이 뭔가 더 말을 하고 있었다.
"응?"
"무슨 생각하냐고."
엘의 단아한 한쪽뺨이 주홍빛으로 물들어있었다.
"응? 아무 생각 없어. 불멍은 원래 아무 생각 없이 하는 거잖아. 후훗."
저 활활 타는 장작불 더미에 던져버릴 수만 있다면.
"언니는?"
"......"
기분 탓일까. 장작불을 바라보는 엘의 주홍빛 홍채가 슬퍼 보인다고 윤조는 잠깐 생각했다.
언니?라고 한번 더 불러 굳이 이 침묵을 깨야할까.라는 생각을 하는데, 냄비 뚜껑이 덜그럭 거리는 소리와 "어머! 국이 끓나 봐!" 하는 소리가 동시에 나며 엘이 몸을 날려 주방으로 튀어갔다.
"어머, 구수한 냄새. 음음, 그때 그 냄새야."
엘이 냄비에 얼굴을 디밀어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게. 냄새는 죽이는데."
주방 공간에 진동하는 북엇국 냄새를 맡자 윤조의 뱃속이 요동쳤다. 속이 벌써부터 풀리는 것 같았다. 꼭 과음한 다음날처럼 속이 까끌거릴 땐 아, 그때 그 북엇국 한 그릇 먹었으면 했었는데. 이렇게 끓여 먹으면 됐을걸.
"밥 풀게. 얼른 먹자. 나 너무 배고파."
엘이 갓 지은 밥을 푸고 김치를 내는 동안 윤조는 마지막으로 파를 넣고 달걀물을 풀어낸 뒤 두 그릇을 펐다.
둘은 식탁에 마주 앉았다. 엘이 국부터 떠서 한 입 삼켰다.
"음, 맛있어. 진짜야, 조! 그때 그 맛 하고 똑같아."
윤조도 뽀얀 국물을 한 술 떠서 호호 불어 먹었다.
"아아, 시원하다."
예상한 맛이었다. 그때 그렇게 억지로 끓여냈던 것과는 다른 맛.
전남편은 북엇국이 맛없다고에서만 그친 게 아니라 자기 여동생에게 어떻게 끓이는지 배워야 한다고 했다. 그 후 제사상에 올렸던 북어는 쥐포로 대체되었다. 쥐포는 누구나 좋아하니까 처치 곤란할 리도 없는 데다 쥐치어도 엄연한 생선이니 제사상에 오를 자격이 있다는 윤조의 경제적이며 합리적인 판단, 아니, 사실은 그녀의 찌질한 복수심에서 벼른 짓이었다. 그날 제사에 참석한 사촌 형들에게 면목이 안 선 전남편은 화를 냈었다.
후우. 휴웃. 뜨거운 국을 불던 야들야들한 입술에 힘이 들어가며 한숨이 나왔다. 그때는 그녀 자신이 맞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일종의 피해자라고 생각했는데.
"아, 난 한 그릇 더 먹을래. 자기는?"
엘이 일어서자 끼익 하고 의자가 뒤로 밀리는 소리가 났다.
"으응. 난 국물 좀 더 먹고 싶어."
"와아. 아직 많네. 내일도 먹을 수 있겠어. 조! 좀 가져가."
"아냐, 언니. 한번 끓여봤으니까 이젠 먹고 싶을 때마다 끓일래."
"나도. 나도 다음부턴 내가 끓여볼래."
윤조가 국그릇을 두 손으로 들어 남은 국물을 마셨고 엘이 한 그릇을 더 퍼주었다.
"그렇게 맛있어, 언니?"
두 그릇 째를 여전히 맛있게 먹고 있는 엘을 보며 흐뭇하게 물었다. 전남편은 한 번도 맛있다는 말을 그녀 앞에서 한 적이 없었다. 십 년 넘게 살면서 그러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푹! 쿠읍! 장작이 타는 소리인가 싶어서 윤조는 벽난로를 돌아보았다.
"흐읍."
"언니? 괜찮아? 왜 그래?"
부산스레 움직이던 엘의 손이 냅킨으로 얼굴을 덮은 채 멈춰있었다.
"나 진짜 왜 이래, 오늘."
냅킨을 뗀 엘의 눈동자가 충혈되어 있었다.
"괜찮아?"
윤조가 일어서려 하자 엘이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돌아가신 애들 아빠 생각이 나서."
"......"
"워낙 솜씨가 없어서 한국 음식도 제대로 못해줬는데. 아, 미안. 아, 정말 나 왜 이러지."
"언니. 겨우 국 간, 딱 맞춰놨는데. 눈물 콧물 빠지면 짜져."
"아유, 그러면 안 되지."
엘이 한번 웃고는 같은 냅킨으로 코를 풀었다. 소리가 컸다.
창밖에 뭔가 아른대 돌아보니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언니! 드디어 터졌다! 구름. 위니펙에서 뭔가 이상하면 무조건?"
"날씨 탓!"
"날씨 탓!"
크흐흑. 큭큭. 엘과 윤조는 괴기한 웃음소리를 내고는 북엇국을 또 한입 가득 넣었다.
눈발에 밖이 밝아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