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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키키 May 13. 2020

되돌아보는 나의 십 대 연애사

김세희 <항구의 사랑>

남학생으로서 여학생들이 이해가 안 갔던 것 중 하나는 바로 화장실 같이 가는 것이었다. 남중 남고를 다녀서 학원에서만 여학생들을 볼 수 있었는데, 여학생들은 한 명이 화장실 갈래? 물어보고는 꼭 같이 가는 것이었다. 만약 남학생들 같았으면 - 화장실 갈래라고 물어보면 - '혼자가 이 미친놈아' 소리가 자동으로 튀어나왔을 텐데. 그리고 가끔 여학생들끼리 손깍지를 끼고 같이 가는 모습도 본 적이 있다. 손을 잡고 다니는 것도 이해가 안 되지만 손깍지라니! 물어보기도 아니 말을 꺼내기도 뻘쭘한 이런 여학생들의 이런 모습들을 소설 <항구의 사랑>에서 살짝 엿볼 수 있다.     



민음사 젊은 작가 시리즈 21편, 김세희 작가의 <항구의 소설>은 순수했던 십 대 여학생의 감정을 세심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지금은 30대의 화자가 떠올리는 십 대 시절의 동성 간의 사랑이야기이다. 부끄러운 기억들로 남겨지는 것이 아닌 그 시절의 감정은 '사랑'이었다고 말한다. 그 시절 여학생들끼리의 동성연애들은 유행으로 치부했을 수도 있었지만 그때 느낀 감정은 현재까지도 또렷하게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유행이 절대 아니었다.

 

사실 이런 내용인지는 전혀 모르고 선택한 책이라서 남자인 나로서는 다소 당황스러운 소설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신선하게도 느껴졌다. 나의 십 대에는 '사랑'이라는 단어는 없었는데, 아니 그 비슷한 감정조차 없었는데. 점심시간에 운동장에서 머리에 김이 나도록 축구만 했던 중학교 시절, PC방만 주구장창 들락거렸던 고등학교 시절뿐이었다. 정말 순진무구했던 나 자신의 중고등학교 학창 시절과 비교를 하면서 동년배의 십 대 여성들의 성숙함에 깜짝 놀란다. 이 소설은 남자들에게는 십 대 여성들의 생소한 감정을 선사하고 여성들에게는 자신들의 십 대 시절의 감성을 불러일으키게 할 것 것 같다.


P. 103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이전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누군가를 그렇게 원했던 적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그녀를 원했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런데 내가 그것을 선택했을까? 오랫동안 나는 내가 그녀를 사랑한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젠 더 이상 그 감정을 내가 선택한 거라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내가 감정을 소유했던 게 아니라 감정이 나를 소유했던 것만 같다. 강물의 표면에 붙들려 이리저리 떠다니는 나무토막처럼 눈에 보이지 않고 파악할 수도 없는 심오한 물살에 고통스럽게 휩쓸려 다녔던 것만 같다. 그 물살의 방향이 바뀌기 전까지는 계속 그렇게 붙들려 실려 가는 수밖에 없었다.


조금 더 생각해보면 나의 십 대에도 이성과의 접촉에 대한 대한 기억들이 존재한다. 같은 학원을 다닌 여학생에게 용기를 내어 껌을 주지만 그걸로 끝났던 기억. 근처 여자 고등학교 축제 때 만난 초등학교 여자 동창에게 대면식(클럽 간 단체 미팅)을 제의했다가 단칼에 까인 기억. 고등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소개팅에 나가서 여자 학생이랑 영화를 보고 스티커 사진을 찍은 일은 잊지 못한다. 어떠한 감정을 느꼈다기보다는 여자 사람이랑 하루를 함께 보냈다는 게 나에게는 신기할 나름이었다. 이성에게 관심이 1도 없던 미숙하고 순진했던 시절들이었다. 소개팅의 마지막에 그 여학생과 악수를 청하고 헤어졌다. 그 여학생과는 삐삐로 음성메시지를 남겨가며 연락을 좀 더 했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아직 까지 남아있는 이런 부끄러운 기억들과 감정들까지 소환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풋풋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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