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 오랜만에 찾은 '나'
그러니까, 나 또한 기뻐서 방방 뛰던 시절이 있었다.
좋은 성적을 받았을 때, 원하던 대학에 들어갔을 때, 안정적인 직장에 합격했을 때.
무수하게 노력하고 고생해서 얻어 낸 ‘성취’라는 것에 기뻐 날뛰던 순간이 분명히 존재했었다.
그 마지막이 아마도 입사 합격 통지를 받았을 때였을 것이다.
그렇게도 원하던 회사였다. 대학 시절 그렇게도 입버릇처럼 들어가고 싶다던 직종이었다.
그렇기에 처음 공채 공고가 페이스북에 떴을 때 받은 문자가 여러 통이었다.
“여기 네가 가고 싶다던 회사잖아!”
합격할 수 있을까 긴가민가 하며 제출했던 입사 원서, 3차까지 갔던 피말리던 면접을 지나,
가까스로 건네받은 합격 통지 문자를 받았던 순간이, 바야흐로 내 인생의 마지막으로 빛나던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5년, 무엇이 달라졌을까.
그렇게나 들어오고 싶어 하던 회사 사무실을 월화수목금 매일매일 들어서는데,
입꼬리가 어느새 축 쳐져 있은 지 오래다.
사무실에 앉아 6시만 기다린다. 6시가 되길 간절히 빌어 본다.
시계침은 냉정하게도 더 빨리 돌아가는 법이 없다.
모든 것이 재미 없어졌고 성과라는 것에도 관심이 없어졌다.
무언가를 하는 과정은 늘 너무나도 고통스러웠으나,
그 끝에는 무언가를 이뤄 냈다는 그 ‘성취’라는 것이 있었다. 그게 나는 조금은 그리웠다.
그러한 감정을 잊은 지 5년. 회사 안에선 느낄 수 없는 그 감정을
나는 자연스럽게 회사 밖에서 찾아 헤맸고
내가 찾은 답은 결국 아무도 하라고 강요하지 않은 자격증 시험공부였다.
“그 공부를 왜 해?”
이러한 질문을 수도 없이 받을 만큼 큰 시험도, 큰 자격증도 아니었다.
내 직무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취준생이었다면 이력서 자격증 란에 한 줄 정도 들어갈 정도의 작은 시험이었다.
“그 공부를 왜 해?”라는 말은 어쩌면 시험을 준비했던 3개월 간 내가 나 자신에게 가장 많이 했던 질문이었다. 퇴근 후 조금이라도 책을 펴고 지식들을 뇌에 꾸겨 넣었던 그 순간순간마다
내가 도대체 왜 사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지 나조차도 이해가 안 됐다.
이 시험을 통과한다고 해서 내 인생이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표면적으론.
그런데 정말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을까?
배우고 싶었던 지식을 탐구하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합격증을 거머쥔 그 순간에 대한 기쁨은
대학에, 회사 공채에 합격한 그 순간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무것도 원하고 바라는 것 없이 죽어 있던 내 심장은 설레며 다시 뛰었고
고생 끝에 얻어낸 ‘성취’는 그렇게 ‘또다시’ 달콤했다.
그것은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우리는 사회에서 하나의 직급으로, 조직의 작은 부분으로 살아간다.
업무를 수행하는 주체가 나 자신이기는 하나,
우리 자신이 하나의 큰 시스템 안의 톱니바퀴처럼 느껴질 때가 적지 않다.
결국 일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A회사의 B대리”가 하는 것이다.
내가 해 낸 프로젝트는 "C팀"이, 내가 따 온 계약은 "A회사"의 몫이 되었다.
어느 순간 돌아보니 정작 '내'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업무 상의 실적이 나에겐 절대로 달콤한 '성취'가 될 수 없었던지도 모른다.
하지만 합격증 아래 이름은 오로지 내 것이었다.
합격하기 위해 습득한 지식은 오로지 내 것이었다.
그것을 위해 투자한 내 시간과 노력 또한 오로지 내 것이었다.
‘나’로서 능동적으로 행동한 것이 너무나도 오랜만이었다. 그래서 그 기쁨은 생각 이상으로 컸다.
작은 시도 하나가 나를 "A회사의 B대리"가 아닌 '나'답게 만들었다.
어떠한 것도 아무 의미 없는 것은 없다. 실제로 하나의 행위가 내 인생의 전체를 바꾸지 못한다 하더라도,
누군가에겐 왜 하는지 모를 의미 없는 것이라도, 그저 스쳐 지나갈 이력서 상의 한 줄의 문장에 불과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함으로써 기뻤고, 즐거웠고, 재밌었다. 그걸로 됐다.
내가 이 원동력으로 사무실 문턱을 넘는 괴로움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다면,
내가 오랜만에 성취의 달콤함을 맛봤다면,
그리고 또 다른 도전에 대해 용감해졌다면,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분명 오늘 조금 더 행복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