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안드레아 Aug 05. 2020

2월이 되면 생각나는 그렇게도
착했던 사람

남들 다 가는 군대에서 만난 특별한 인연

사회 생활을 하다 보면,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을 마주하게 된다. 

웃음 짓는 미소 이면에 다른 것들을 품고 있는 듯한, 가면을 쓴 채 살아가는 이들 말이다.

가면을 쓰고 사는 것은 나 또한 별반 다르지 않은데 특별히 이상하게도 음흉해 보이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내가 이 회사의 대리가 아니면 나를 거들떠도 보지 않을 사람. 

그럼에도 지금 내 앞에서는 너무나도 친절한 사람.

그런 사람들을 만나고 온 날이면, 유난히도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다. 

겉과 속이 다른 게 없었던, 순수하고 선함만이 존재했던 그 사람. 

자주 연락하지 못해 미안한 그 사람 말이다.

그의 첫인상은 어리숙해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부러 내비치려 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던 선한 인상만은 계속 내 뇌리에 남아 있다.


그는 내가 10년 전 전역했던 군대에서의 내 맞선임이었다. 

그는 내가 자대 배치를 처음 받았을 당시, 

일을 잘 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고는 부대 내 입장이 애매한 상태였다. 

내가 갑작스레 보직이 바뀐 것도 사실은 그 때문이었다. 

군 생활 적응에 혼란스러워 했던 그가 상대적으로 어려운 업무가 적은 보직으로 변경되면서 

신병이었던 내가 그를 대신하게 된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로선 맘에 들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 빌미를 제공한 그가 사실은 조금은 원망스러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착한 심성은 나에게 그런 감정을 단 한번도 들지 않게 해주었다. 

그는 그 정도로 믿을 수 없을 만큼 착했다.


그는 말수가 적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말을 많이 할 심적 여유가 없었다. 보직이 이동되면서 사실상 찍힌 상태. 

간부들과 선임들은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그를 조금은 무시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기에 그 군대 안에서 그의 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편 없기론 당연할 수 밖에 없던 신병이었던 나는 그렇기에 그와 금방 친해졌다.

우리 둘은 잘 맞았다. 

말수 많은 나는 내무실에서 말 한마디 못하던 신병이어서 내 말을 잘 들어주는 그가 좋았고, 

좋지 않은 상황에 놓여 있던 그도 나랑 있는 시간에만 맘 편히 웃고 떠들 수 있었다. 

그는 내가 맞후임이기에, 신병이기에 정말 ‘관례 상으로’ 한번 쯤은 혼낼만 한데 

2년 간 단 한번도 나에게 싫은 소리조차 한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난 항상 고맙고 미안했다.



사이가 좋던 말던 어찌됐건 그와 나는 하루하루가 지옥같던 일,이병 상황에 있었다.

하루는 야간 근무를 끝내고 밤 11시쯤 우리 둘이 내무실로 돌아가고 있을 때였다. 

우리 둘 다 몸도 마음도 힘들었던 순간이었다. 

근무지에서 내무실로 가는 길은 가로등 몇 개만 살짝 조명을 비춰주었고 

그 어둡고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이 우리의 마음과도 같았다.


이런 느낌이었을까? 


“힘내십시오. 우리가 지금은 이렇게 힘들어도 언젠가 서로가 병장, 상병이 되서 웃으면서 

이 똑 같은 길을 걸을 날이 오지 않겠습니까?”



내가 위로한답시고 내뱉은 그 말에 그는 ‘허허 그렇겠지’하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솔직히 그런 말을 하면서도 그런 날이 정녕 올지 나조차도 앞이 까마득했다. 그저 그 상황엔 그를, 

그리고 나를 위로해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힘들 땐 희망이 보이지 않는 법이다. 

이 순간이 시간이 지난 후 ‘그땐 그랬지’하며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추억이 될지 그 때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는 상병을 달면서 밝아졌다. 군대는 짬이 모든 걸 해결해 준다고 했고, 그 또한 그랬다.

우린 더욱 더 친해졌고 이제 눈치 볼 놈들도 없었다. 그렇게 편해진 지도 잠시, 

시간은 훌쩍 흘러 우리에게도 이별의 순간은 찾아 왔다. 그의 전역이었다. 

그는 전역을 하는 건 기쁘지만 나를 비롯한 후임들과 헤어진다는 것이 많이 아쉽고 섭섭하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전역의 순간까지 후임들과의 추억을 생각하고 더 함께하지 못함에 아쉬워했다. 

그가 그렇게 말하고 행동함이 절대 가식이 아니었음을 난 안다.


세상에 아무리 착하다 착하다 해도 저런 선임은 없다. 


그렇게 그는 수많은 기억을 뒤로 하고 전역했다. 

한국 남자들에게 군대라는 곳은 참 떠올리기 싫은 기억일 것이다. 

하지만 난 가끔 ‘내가 군대를 오지 않았더라면 그도 만나지 못했겠지’란 생각을 한다. 

이렇게 좋은 사람을 평생 만나지 못했을 거란 생각이다. 

그는 이런 생각이 들게 할 정도로 좋은 사람이었다. 



그와 함께한 2년 남짓. 우리는 일,이병에서 둘다 병장이 될 때까지 함께였다.



같은 생일의 두 남자.


같은 생일의 두 남자가 같은 시기에 같은 부대, 같은 근무지의 맞선임과 맞후임으로 만날 확률, 

그리고 그 둘이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을 공유할 확률, 

그 누구보다 서로를 아끼는 선후임이 될 확률은 얼마나 될까? 

그렇게 만난 그가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좋은 사람일 확률은?


2월 11일. 나와 4년 차이로 같은 날에 태어난 그 사람.

매년 생일 축하 카톡을 받다 보면, 당연하게도 같은 생일의 그가 생각난다. 

생일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을 몇 년 째 망설이다 용기를 내어 오랜만에 보냈을 때,


“아이구, 고맙데이~ 잘지내나? 너도 생일 축하한데이~”


라며 보내온 그의 답장 속에서 순수했던 그 때의, 10년 전의 그의 모습이 나도 모르게 겹쳐 보인다.




야간 근무가 끝나고 힘든 몸과 마음을 이끌고 내무실로 돌아 가던 그 길을, 

정확히 1년 후, 우리는 웃으며 걸었다. 

내가 1년 전 희망사항으로 말했듯이 그는 병장이었고 나는 상병이었다. 



“1년 전 기억나십니까? 제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 힘내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 내가 어떻게 그 날을 잊을 수 있겠나?”


우린 정확히 1년이 지난 그 날, 그렇게 웃었다. 

작가의 이전글 나인 투 식스, 그 밖의 삶을 꿈꾼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