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행복조각

by 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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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옆집에 사는 아주머니가 어느 날 우리 집으로 찾아오셨다. 내일 아차산에 있는 영화사에 아들과 가려고 한다며 나와 동생을 데리고 가도 되느냐고 엄마에게 물어보셨다. 옆집엔 한 살 터울인 내 여동생과 동갑인 외동아들이 있었고 우리는 같은 초등학교에 다녔으며 하교 후 매일 골목길에서 함께 놀던 사이였다. 그랬으니 엄마가 아주머니의 제안을 반대할 이유는 특별히 없을 거였다. 만약 종교가 달랐다면 곤란해하셨을지도 모르겠지만 우리 집은 무교였고 불교에 호의적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다음 날 아침이 되었다. 절이라는 곳에 가본 적이 없어 아주머니를 따라 소풍 가듯이 동생들과 신나게 따라나섰다. 이른 시간이었는데도 절엔 사람이 많았다. 사람들이 길게 늘어선 줄이 몇 곳 보였는데 한 곳은 대웅전에 들어가기 위한 줄이었고 다른 한 곳은 아기 부처님을 목욕시키는 줄이었다. 조그마한 바가지 같은 걸로 아기 부처님에게 물을 끼얹는 모습이 재밌어 보여 그쪽으로 줄을 섰다. 내 차례가 다가오자 앞에 계시던 할머니를 따라 아기 불상의 정수리와 양쪽 어깨에 한 번씩 총 세 번 물을 끼얹고 합장을 한 후 내려가 동생들과 아주머니를 기다렸다. 그런 후 우리는 다시 한번 긴 줄을 서야 했다. 바로 공양을 받기 위한 줄. 긴 시간 끝에 입구가 넓은 그릇을 받았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초라해 보이는 야채만 가득 들어간 비빔밥에 큰 실망을 했었다. 아쉬운 대로 밥알과 야채가 잘 어우러지게 쓱쓱 비빈 후 한 술 크게 떠서 별 기대 없는 입으로 밥을 밀어 넣었다.


'대박...! 뭐지...?'


소박했던 모습과 달리 입안엔 향긋하고 싱싱한 재료의 맛이 완벽하게 어우러지고 있었다. 석가탄신일이었던 그날, 절에서 먹었던 비빔밥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 덕분에 난 나이롱이지만 불자가 되었다. 딱히 교리를 공부하지 않지만 불교란 종교라기보다 철학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편이고 내가 추구하는 삶과 결이 비슷해 마음을 다독이고 싶을 때마다 혼자 절에 가곤 한다. 그리고 성년이 된 후엔 부처님 오신 날이 되면 반드시 절에 간다. 어릴 때처럼 공양을 받기 위해 줄을 서진 않지만 경건한 마음으로 절을 한 바퀴 돌고 미륵 대불 앞에 서서 합장한 후 일 년 동안 묵은 욕심을 벗어 놓는 나만의 의식을 치른다. 그러고 나면 목욕탕에서 나와 신발을 신을 때처럼 발걸음이 포근해진다. 올해도 1년 동안 쌓인 속세의 때를 씻어냈으니 내년까지 열심히 번뇌와 씨름 할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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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이건 뭐예요. 사장님?"

"더위사냥이요. 하하"

"더위사냥이요...?"

"네... 하하"


애정하는 동네 카페에 앉아 독서를 하고 있는데 사장님이 서비스라며 커피를 한 잔 주셨다. 처음 보는 메뉴라서 제목을 여쭤봤더니 '더위 사냥'이란 말이 돌아왔다. 대답을 듣고 약간 갸우뚱했지만 커피를 입안으로 가져가자 무슨 말인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갑자기 날이 덥다며 너무도 유명한 아이스크림의 맛과 비슷하게 달달하고 시원한 커피를(메뉴에 없는) 만들어 주셨던 거였다. 오랜만에 달콤한 게 들어가니 정신이 번쩍 들며 활자가 눈에 더 잘 들어왔다. 행복했다. 다들 비슷하겠지만 나도 그렇다. 물질적인 것보다 마음을 받았을 때 진짜 행복을 느낀다. 조용하게 배려해 주신 사장님의 마음에 정말 행복했다. 느닷없이 찾아오는 일상의 반가움을 만날 수 있어서, 사람 사는 맛을 느낄 수 있어서 큰 행복이었다.


'사장님. 오늘 하루 행복하게 해 주셔서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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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중대한 선택을 내려야 할 땐 최대한 나를 위한 결정을 하며 살아왔다. 그럴 수 있던 이유 중 제일 큰 것은 든든하게 뒤에 계시던 부모님이었다. 부모님은 언제나 내가 원하는 것을 후회 없이 하길 바랐고, 실패하는 것의 두려움은 넣어두길 바랐다. 잘 생각해 보면 새로 시작하는 것도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지만 그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했던 순간은 쌓아 올린 것들을 등 뒤로 두어야 할 때였다. 그건 마치 내 영혼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 그때마다 내게 용기를 준 건 부모님이었다. 두 분에게 고민을 털어놓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마음으로 기대고 있었기에 매듭도 잘 지을 수 있었고 새로운 시작도 할 수 있었다. 평소엔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마음을 '어버이날'로 핑계 삼아 하루만이라도 항상 고맙고 사랑한단 마음을 글과 말로 토해내 본다.


'항상 고맙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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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이었다. 그런 날 하필 약속이 잡혀있었다. 빤히 눈에 보이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만한 그럴듯한 핑계 하나 만들어서 약속을 취소하고 우중런이나 실컷 한 후 혼자 집에 있고 싶은 날이었다. 그래도 오래전에 잡은 약속인데 기분 내키는 데로 할 만큼 간이 크진 않아서 적당한 시간을 골라 집을 나섰다. 빗소리가 반갑기는커녕 마음에 괜한 쓸쓸함만 덧대었다. 우산을 쓰고 거리를 걷는데도 기분이 나아지질 않았다. 뭔지 몰라도 1년에 두세 번 있는 그런 날이었나 보다.


약속 장소가 있는 역에 내려 출구 방향을 찾는데 창밖으로 한강이 보였다. 나보다 더 쓸쓸해 보이는 한강이 보였다. 평소와 달리 사람은 보기 어렵고 불어난 물만 바삐 흐르는 한강. 파란빛의 한강을 보자 왜인지 모르겠지만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내 마음보다 더 차가워 보여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출구를 찾는 것도 잊은 채 가만히 서서 아무 생각 없이 창밖을 보고 있었다. 정신이 들었을 땐, 한강 위로 지나가는 강변북로의 차들이 눈에 들어왔다. 노란색 택배차도 지나가고 있었고 조그마한 붉은색 차도 지나가고 있었다. 강물보다 더 느리게 흘러가는 차들 사이에서 또 한 번 위안을 얻었다.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이유를 찾아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흘러가는 차와 강물을 바라보며 위안을 얻을 뿐. 한강은 언제나 나에게 그런 존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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