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양반*과 우중런.
나는 부상 여파로 기량이 후퇴 상태에서 제자리걸음 중이다. 그 사이 열심히 한강을 달린 바깥양반은 폼도 꽤 괜찮아졌고 5분대 페이스에서도 낮은 심박수로 곧잘 달리는 모습을 보이는 중이었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밤이기도 하고 우중런을 해본 적이 없는 바깥양반이 달리러 나갈까 말까 고민하고 있길래 나랑 나가자고 했다. 원래는 쉬는 스케줄이었지만 우중런을 한번 해보면 다음에는 망설임 없이 나갈 것 같아서 같이 달리자고 했다. 대신에 페이스는 어쩔 수 없이 나에게 맞춰 뛰면 좋겠다고 했고 바깥양반도 좋다고 했다.
비 올 때 가장 신경 써야 할 건 러닝화다. 로드는 주행 환경이 일정하지 않고(한강 길이라고 해도 그렇다) 비가 내릴 땐 미끄러울 수 있기 때문에 밑창이 너무 닳은 러닝화는 좋지 않다. 어쩔 수 없다면 인지하고 있어야 할 부분이다. 특히 속도 방지턱처럼 도로에 페인팅이 되어 있는 곳은 비가 내리면 미끄럽기 때문에 이곳을 지나가야 할 땐 신경을 써야 한다. 그 외에 신경 쓸 거라곤 모자를 쓰는 게 시야 확보에 도움이 된다는 것과 방수가 되는 러닝 벨트에 핸드폰을 넣어 다니면 조금 더 쓸모가 있다는 것 정도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한 가지를 추가하자면 비 올 때만큼은 고글을 쓰지 않는 게 좋다. 적은 비는 괜찮지만 많이 내리면 마치 비 오는 날 와이퍼가 고장 난 차를 몰고 다는 것만큼이나 위험할 수 있다.
옷을 갖춰 입고 밖으로 나갔다. 신발과 양말이 젖는 느낌을 싫어하는 바깥양반은 벌써부터 얼굴을 찌푸린다. 막상 달리기 시작하고 웅덩이에 발이 한두 번 빠지면 그때부터는 자유를 느낄 수 있다고 말해줬다. 그래도 발이 젖는 게 싫다는 바깥양반. 달린 지 1분도 지나지 않아 그녀는 웅덩이가 내어 준 자유를 반강제적으로 얻었다. 그렇게 우리는 비를 맞으며 한강으로 접어들었고 내 페이스에 맞춰 천천히 달렸다.
비로 젖으나 땀으로 젖으나 여름에 옷이 젖는 건 똑같다. 물론 신발이 젖고 양말이 젖는 게 처음엔 어색하지만 몇 번 경험하면 그 자체가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걸 알게 된다. 나는 그걸 바깥양반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비를 맞으며 달릴 때만 느낄 수 있는 해방감을.
"비 맞으면서 달리니까 좋지?"
"어! 엄청 좋아! 계속 달리고 싶어. 하니처럼!"
"하하. 그래 그럼 달려! 이제 자기 별명은 '워니하니'야!"
"워니하니? 모야! 하하!"
어색해하면서도 새로 지어 준 별명을 꽤 마음에 들어 하는 바깥양반이다.
처음으로 함께 달린 우중런이 올 여름비가 선물해 준 행복이다.
*바깥양반은 제가 아내를 '글'속에서 부르는 애칭입니다.
서울국제도서전.
작년에 이어 올해도 서울국제도서전에 다녀왔다. '텍스트 힙' 열풍이란 말은 분명히 작년에도 들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리버드 티켓을 구하는 게 어렵지 않았었고 사정이 있어 단 하루만 방문했는데 행사가 끝난 후 역대급 인파였다는 증언이 여기저기서 쏟아졌었다.
그런데.
올해 국제도서전은 티켓 구매하는 것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무슨 정신이었는지 1차 얼리버드 티켓 구매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뒤늦게 공식 홈페이지에 접속했더니 이미 2차 얼리버드 티켓 창이 열려있는 상태였다. 예약 페이지로 넘어가려는 찰나 팝업창이 뜨며 공지가 하나 올라오는데... 느낌이 쎄 했다. 천천히 공지를 읽었다. 믿을 수 없는 말이 적혀 있었다. 티켓이 매진되었으며 현장에서는 티켓을 구매할 수 없단 말이었다.
'매진?'
'현장 구매 불가?'
새벽이라 침침해진 눈이 글을 잘 못 읽은 줄 알았다. 그러나 몇 번을 다시 읽어봐도 눈이 잘 못 된 것도, 의심했던 문해력도 문제가 없다는 것만 알게 되었다. 진짜 매진이 되었던 거였다. 이대로 포기할 순 없었다. 수백 번 새로고침을 했을까? 결국 18일 개막식 날 딱 하루만 참석할 수 있는 티켓이 오픈되었다.
개막식 당일 점심시간 코엑스 전시장. 국제도서전 입장 대기 줄이 길게 늘어선 A홀 입구를 유유히 지나 아무도 없는 B홀 입구를 통해 행사장 안으로 들어갔다. 와... 평일 낮인데도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작년에는 주말에 갔지만 이 정도 인파는 아니었는데 무슨 콘서트장에 온 것 같은 수준이었다.
대형 출판사 부스는 가지도 않고 바로 독립 출판사 부스부터 찾았다. 작년에 참석했을 때 꽤 애정이 갔던 출판사 부스가 보여 반가운 마음으로 달려갔다. 고맙게도 대표님이 나를 알아보시는 바람에 출판사의 근황 이야기도 가볍게 여쭤봤고 책 이야기는 더 자세히 물어볼 수 있었다. 내가 좋아하게 된 출판사가 아직도 잘 활동하고 있어 고맙단 마음에 이 말을 대표님께 건넬까 하다 오버하는 것 같아 마른침과 함께 삼켜버렸다. 대신 가벼운 응원 인사를 드린 후 국제도서전에 참석하는 이유를 찾으러 다른 부스로 이동했다.
나는 '나'와 결이 맞는 독립 출판사를 찾으러 이 행사에 매번 참여하고 있다. 대형 출판사에서 느낄 수 없는, 고유한 개성과 정성이 가득한 책을 만드는 출판사를 만나고 싶어 자그마한 부스를 기웃거린다. 그럴 때마다 책 뒤에 서 계신 관계자들과 눈이 마주치곤 하는데 그때 느낀 그들의 간절한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잠깐이라도 좋으니 자식과도 같은 책들을 조금이라도 봐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아마도 그 이상의 감정이 아닐까 싶다.
발걸음을 옮기다 결이 맞을 것 같은 출판사 앞에 섰다. 역시나 대표님으로 보이는 분이 가볍게 말을 건넨다. 독립 출판사 부스는 이렇다. 책을 한 권 집어 들면 그들은 미술관의 도슨트로 변신한다. 이 책이 어떻게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는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정말 친절한 설명과 함께 책에 빠져들 수 있다. 이건 오로지 독립출판사 부스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경험이다. 나는 이 감정을 잊을 수가 없어 매년 새로운 친구를 사귄다는 마음으로 국제도서전에 참석한다.
올해도 새로운 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대표님과 가볍게 시작했던 대화는 절대 가볍지만은 않은 대화로 이어졌다. 앞으로도 새로 만난 출판사가 꾸준히 활동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행사장을 나왔다.
올해의 국제도서전도 나에겐 행복이었다.
글쟁이들과의 축제.
내게는 애정하는 모임이 몇 있는데 그중엔 함께 글을 쓰는 모임이 있다. 이 모임을 만든 사람 S의 이야기를 빌리자면 선한 영향력을 세상에 전하고 싶어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S와는 온라인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고 만약 S가 모임을 만든다면 무조건 참여하겠다고 했던 게 1년 전이다.
두 번의 모집을 거쳐 지금은 17명이 모여 함께 글을 쓰고 있다. 그 첫 번째 결과물로 '엄마'라는 주제를 가지고 출간까지 하게 된 거다. 공저에 참여한 건 처음이었는데 단어 하나로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단 게 놀라웠고 그 안에 담긴 저마다의 사연에 큰 감동을 받았었다. 우리 손으로 직접 책을 지으며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다. 빈 종이에 글자를 채우고 글자 안에 사연을 담고 사연 속에는 쉽게 꺼내기 힘들었던 감정을 녹여냈다. 비어있던 종이는 235g짜리 한 권의 책이 되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몇 달 전, 지난 1년을 돌아보며 추억하고 즐기자며 S가 북 콘서트를 하자고 했다. 가족이나 친구, 다른 곳에서 글을 쓰고 있는 지인들까지 우리가 만든 무대로 초대하자는 것이었다. 좋은 아이디어였다. 우리는 몇 달에 걸쳐 각자에게 할당된 일을 기획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평생 처음 하는 일에 도전했다. 그리고 어제가 바로 D-Day였다.
주말과 저녁 시간을 반납하며 열심히 준비 한 무대였다. 100% 완벽하진 못했지만(사실 99% 완벽했다) 오히려 그래서 좋았다. 우리는 프로가 아니니까 괜찮다는 게 아니었다. 뚝딱거리는 모습을 보면서도 응원해 주고 즐거워하는 관객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우리의 여정을 진솔하게 소개할 수 있어 좋았다. 글을 쓴다는 것에 얼마나 진심인가를 보여줄 수 있어서 마음이 벅차올랐다.
우리는 처음부터 '함께'였고 앞으로도 '함께'일 거다.
내게 함께할 글 친구들이 있단 게 행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