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룩이 어때서

by 윤기





이번 주 목요일은 우연히 만난 빨래 이야기에서 지난 시간을 돌아보게 된 날이었다.


친한 후배를 만나러 충정로에 가는 길. 출근 시간이 한참 지난 뒤라 그런지 2호선은 한산했다. 자리에 앉아 어젯밤 읽다 말았던 안희연 시인의 산문책*을 펼쳤다. 「그래도 표백은 싫어요」라는 꼭지가 시작되자 첫 문장부터 웃음이 새어 나왔다. 문학 팟캐스트에 초대받아 나간 자리에서 빨래 이야기만 실컷 하고 왔다는 말이 왜 이리도 반가운 건지. 심지어 섬유유연제를 잔뜩 사다 두고 기분에 따라 달리 쓴다는 이야기를 들을 땐, 나만큼이나 오묘한 빨래 세계관을 갖고 있는 것 같아 반갑기까지 했다. 지난 1월, 이번 브런치 북 연재의 첫 글로 「밤의 선라이즈」를 쓰며 빨래 이야기를 잠깐 꺼냈었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독자들이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질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 그들은 저마다의 빨래관을 드러내기에 바빴고 어떤 독자는 기회가 되면 조금 더 공유해 달라는 요청을 할 정도였다.


일과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빨래다. 재택근무가 잦다 보니 바깥양반을 대신해 집안일을 처리할 때가 많은데 그중 대표적인 게 세탁이다. 그 어떤 집안일보다 섬세함을 요하는 작업. 명확한 기준에 따라 세탁물을 분류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색감에 따라 1차 분류를 하고 원단 종류에 따라 2차 분류를 한다. 여기까지 마치면 대부분의 사람은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바로 3차 분류에 이르러야 본격적으로 나의 빨래 철학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2차 분류까지 마친 세탁물을 다시 세분화하는 기준은 사용할 세제의 종류, 섬유유연제의 사용 여부, 물의 온도로 나눌 수 있다. 예를 들어 오리털이나 거위털이 충전된 패딩이나 이불은 섬유유연제를 사용하거나 드라이클리닝을 맡기면 안 된다. 단 한 번의 선택으로 본래의 기능이 대부분 상실되니 매주 조심해서 다뤄야 한다. 이 기준은 운동복(러닝, 등산 등) 같은 기능성 의류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이 밖에도 니트, 속옷, 수건, 베개, 모자, 신발 등 3차 분류에 속하는 것들이 많다.


세탁을 마치고 나면 건조를 해야 하는데 나는 건조기 대신 옷감의 수명을 위해 제습기를 사용한다. 기능성 의류는 1시간이면 웬만한 건 다 마르고 그 밖의 옷은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최대 8시간 정도면 충분히 뽀송뽀송한 상태가 된다. 건조를 마친 옷을 만나러 갈 때면 언제나 설렘 가득이다. 빨래를 했다고 해서 새 옷을 가지게 됐을 때의 기분을 되찾는 건 아니다. 심지어 원단 깊은 곳까지 침투한 얼룩도 여전히 남아있지만 아주 약간이나마 회춘한 것 같은 모습에 마음은 곧 밝아진다. 어릴 때는 옷이 더러워지는 게 싫었다. 금방 헌 옷이 된 것 같아서였다. 구멍이 나거나 찢어진 게 아닌데도 얼룩 하나 보이는 게 그렇게 속상했다. 그랬던 나도 옷과 함께 나이를 먹어가니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을 만날 수 있었다. 옷장 문을 열고 10년, 20년을 함께 한 청바지를 꺼내 입을 때마다 지난 어느 날, 삶의 한 페이지를 채워줬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모든 순간과 사람을 기억할 수 없어 안타깝지만 그들이 남긴 시간은 흡착된 얼룩 안에 고스란히 자리 잡고 있다. 오늘은 J가 떠올랐지만 다음엔 Y가 떠오를지도 모른다. 나도 모르게 자주 닿았던 곳에 생긴 해짐과 작은 흔적. 그런 것들이 지나온 시간을 말해 주고 있었다. 침묵의 시간을 견디며 그렇게 나를 기록해 주고 있던 거였다. 이제는 그것들을 애써 지우려 하지 않는다. 어릴 때처럼 너무 깨끗하게 입으려 하지도 않는다. 새끼손톱보다 작은 얼룩에도 내가 지나온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 나와 얼룩, 둘만 알고 있는 비밀처럼 특별하다. 어떤 날은 더러워진 옷을 세탁기에 넣듯 지친 마음도 깨끗이 지워 버리고 싶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세제를 쓴다 해도 깊은 곳까지 달라붙은 자국은 결국 사라지지 않는다. 이제는 안다. 그것을 모두 닦아내야만 마음이 맑아지는 게 아니란 걸. 이 순간에도 나를 대신해 이 시간을 기록하고 있을 얼룩을 대신해 말하고 싶다.


"얼룩이 뭐 어때서!"



*안희연, 『당신이 좋아지면, 밤이 깊어지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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