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처럼 흘러간 하루

by 윤기





이번 주 목요일은 유유자적한 하루를 보낸 날이었다.


평소처럼 새벽까지 일을 마친 후 잠시 독서를 하고 나니 5시가 넘어서야 잠에 들었다. 오전 10시가 되면 눈을 뜨고 하루를 시작한다.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이부자리 정돈이지만 작년 겨울, 허리를 다친 이후부터 생긴 습관이 그 자릴 대신하고 있다. 침대 옆에 서서 몸을 반듯하게 만든 후 코어에 지긋이 힘을 밀어 넣는다. 그런 후에 양팔을 벌려 허리춤에 손을 얹고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리기 시작한다. 이어서 허리를 서서히 뒤로 말아준다. 몇 시간 동안 굳어 있던 디스크에 점점 탄력이 돌아오는 듯한 기운이 돈다. 안방 천장이 시선에 들어오고 허리가 적당히 말리면 동작을 멈추고 숫자를 센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고개를 다시 정면으로 천천히 가져오면서 아치를 그리던 허리를 바르게 만든다. 이렇게 스트레칭을 다섯 번 마치고 나면 하루를 잘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은 단단한 마음이 생긴다. 그제야 널브러진 이부자리를 정돈하고 샤워를 한다. 다시 안방으로 돌아와 비오템에서 나온 남성용 올인원 로션을 얼굴에 툭툭 바르고 젖은 머리를 정성 들여 말린다. TV에서 봤는데 머리를 잘 말려야 탈모를 예방할 수 있다고 한다. 어느새 머리카락 숫자도 꼼꼼히 챙겨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세탁 후 잘 개어놓은 티셔츠를 옷장에서 꺼내 입는다. 그런 후에 포마드를 손에 잘 펴서 머리에 고르게 바른다. 집을 나서기 전 해야 할 일이 더 있다. 두 눈으로 집안 곳곳을 둘러보며 자리에서 이탈한 잡다한 물건들을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그러고 나서 작은 방 한쪽 벽에 걸어 둔 다이슨 청소기를 가져와 집안의 먼지를 걷어낸다. 밤새 충전해 놓았던 아이패드와 새벽에 읽다가 덮어두었던 시집을 가방에 챙겨 넣고 나서야 현관문을 밀고 나오며 오늘은 어느 카페에 가서 원고를 읽을까 행복한 고민에 빠져든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와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보니 오늘은 스타벅스가 좋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 발걸음을 서쪽으로 옮긴다.


오늘은 검토해야 할 다섯 편의 원고가 있다. 내일이 매월 한 번 있는 합평회 날인데 멤버들의 글을 세 번 읽고 참석하는 게 스스로 만든 규칙이다. 원고가 올라온 다음 날인 화요일에 한 번 읽었고 오늘이 두 번째다. 재독할 때는 비평할 내용을 본격적으로 메모한다. 내일 아침, 모임 장소에 1시간 일찍 도착해 정리해 둔 내용을 중점적으로 들여다보며 삼독하면 합평회 참석 전 루틴이 끝난다. 나는 합평회의 모임장을 맡고 있는데 이번엔 특별한 시간을 가지려고 고민 중이다. 이 모임이 금화글방이란 이름으로 시작된 지도 벌써 7개월이 되었다. 이쯤에서 비평을 대하는 각자의 입장을 한 자리에서 들어보고 고민해 보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누군가의 글을 비평한다는 건(심지어 저자 면전에다 대고) 생전 처음 느끼는 불편함이었다. 그러다 보니 내가 뱉은 말의 적절함과 부족함에 끝없는 고민이 이어져 왔다. 한 번은 비평할 때 배려심이 부족했던 것 같아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괴로웠던 적도 있다. 이런 문제를 종합해 보면 아직은 충분한 소양을 갖추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란 생각이 들었다. 비평하는 처지에서의 고민도 깊었지만, 비평받는 입장에서의 고민도 상당했다. 내가 제출했던 원고가 좋은 비평을 받기 위한 재료로서 충분한 태도를 갖추고 있는 것일까? 란 생각이었다. 내게는 모두 어려운 문제였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멤버들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고 나와 같지 않더라도 혹시 비슷한 문제나 아니면 다른 고민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 같아 한 줌도 안 되는 글방지기의 권력을 이용해 강제 설문조사에 들어갔다. 왜 이런 걸 하는지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생각보다 큰 저항 없이 그들의 생각을 접할 수 있었다. 원고 검토를 마친 후 멤버들이 써 내려간 말들을 취합했다. 모아놓고 보니 관점의 차이는 있었지만 고민의 결은 비슷하단 걸 알 수 있었다. 그들의 마음을 읽어보며 내가 이 모임의 리더로 있는 이상 지금보다 발전적이고 건전하며 안정적인 합평회로 나아갔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한 달에 한 번이지만 내 글의 비판을 받고 싶어 용기를 낸 사람들이 모였으니 무엇이 되었든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는 모임이 되어야 한단 마음이었다.


스타벅스에서 합평회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덧 영화 시작 시간이 가까워져 있었다. 오늘은 오랜만에 극장에서 혼자 영화를 보는 날이다. [초속 5센티미터]라···. 제목이 마음에 들어 예매를 했다. 나는 일본 영화 특유의 잔잔한 스토리와 따뜻한 영상미를 좋아하는 편인데(물론 아닌 영화도 많지만) 이 영화라면 그런 기대감을 충족시켜 줄 것 같았다. 영화는 2시간이 흘러서야 끝이 났다. 조용히 흘러가던 이야기는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토해냈다. 그런데 나는 크게 공감할 수 없었다. 마지막 장면을 보여주려고 1시간 넘게 감정선들을 모았던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거였다면 더욱더 실망이었다. 꼭 그러지 않았더라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마음이었다. 달리 생각해 보니 공감하지 못했던 건 내 탓일지도 몰랐다. 그것들이 납득될 만큼, 어쩌면 순수한 마음이 남아 있지 않을 수도 있는 거니까. 그런데 영화의 결말보다 시선에 걸리던 것이 하나 있었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사용한 미스트 필터였다. 사진에서도 뭔가 몽환적인 분위기나 따스함, 화사함 같은 걸 표현하고 싶을 땐 미스트 필터를 쓴다. 요즘엔 디지털 작업이 대세니까 포토샵에서 후반 작업으로 만들어 낼 수 있지만 렌즈 앞에 필터를 달아 물리적 효과를 내는 것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나는 영상 전문가가 아니다 보니 영화에서 필터를 사용한 것인지 후반 작업을 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내 기준에선 조금 과하고 부자연스럽게 다가왔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기억 속에 오래 남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독특한 대사가 기억에 남기 때문인데 어떤 것들을 숫자로 표현하는 게 특히 그랬다. 벚꽃이 떨어지는 속도가 초속 5센티미터라든가,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단어가 5만 단어 정도라든가, 주인공의 나이가 곧 서른이라고 하자 걸어서 지구 한 바퀴를 도는 시간이라고 표현하는 것들이 그랬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숫자가 있었다. 사람이 만날 확률은 0.0003% 정도라는 이야기였다. 나는 0.0003%라는 확률이 어느 정도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AI에게 이 확률에 대해 물었다. 몇 초 만에 얻은 답은 충격이었다. 사람이 만날 확률이 벼락을 맞을 확률보다 20~30배나 희귀한 거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동안 내가 만난 사람들은 번개를 스무 번이나 맞을 확률을 뚫은 인연이란 말이었다. 그렇게나 귀한 거였다니···. 그동안 나를 지나갔던, 이제는 연락이 닿지 않는 사람들의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이런 상념들 속에 잠겨 있다 보니 마을버스는 어느새 강변역에 다다르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하차 벨을 누른 후에 서둘러 버스에서 내렸다. 두 달 만에 헬스장으로 가는 길. 어둠은 어느새 도시 위로 천천히 내려앉는 중이었다. 건널목 앞에 선 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차가워진 바람이 두 뺨을 스치며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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