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야 하는 것에 대해

by 윤기





이번 주 목요일은 무작정 걸었던 하루였다.


목요일에 일어나는 흔적들을 담아보기로 한 게 벌써 3개월이 다 되었다. 이 엉뚱한 연재를 하면서 목요일은 뭔가 특별해야 할 것 같은 날이 되었다. 그렇지만 일주일에 단 하루, 그날을 글감으로 만든다는 건 생각만큼 어려운 일이다. 취침과 기상, 재택근무를 하다 늦은 점심을 먹고 설거지를 마친다. 그런 후 업무를 다시 이어가고 적당한 시간이 되면 운동을 다녀온다. 집안일을 마무리하고 독서를 한다. 나의 하루는 보통 이렇게 흘러간다. 출퇴근을 집 밖으로 다니지 않다 보니 나갈 일을 애써 만들지 않으면 단조로운 하루가 반복될 뿐이다. 배율 높은 현미경을 들고 샅샅이 살펴보지만 지루한 일상에서 글감을 발견하는 건 만만치 않은 일이다. 그래서 특별한 조처를 내렸다. 지난달부터 목요일 오후엔 자유시간을 강제로 부여했다. 급한 업무와 매일 제출해야 하는 영어 숙제는 가급적 오전에 끝낸다. 말이 오전이지 일어나는 시간이 늦기 때문에 단 몇 시간 만에 후딱 해치워야 한다. 성의 있는 자세로 임하는 건 포기다. 이렇게 마음먹지 않으면 글감 사냥을 나설 수 없다. 오늘은 평소보다 더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빛의 속도로 업무를 마치고 영어 공부는 저녁으로 미뤘다. 벌써 마음이 무거워진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오늘은 목요일이니까. 무작정 걸어보기로 했다. 대신, 우리 동네 말고 남의 동네를.


2호선 지하철에 앉아 독서를 하려고 가방을 여는데 책을 두고 나온 게 그제야 생각이 났다. 어제부터 읽고 있는 것은 『감각의 설계자들』이다. 미래 소비의 핵심으로 감각이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책이다. 그것의 최전선으로 유럽을 꼽았는데 다양한 분야에서 미래를 예측한다. 호텔과 미식, 예술 챕터를 거쳐 이제 막 도시재생 챕터를 끝낸 참이었다. 사실 이 책을 선택한 큰 이유 중 하나가 도시재생이었다. 추상적이고 주관적인 개념이 강하지만 감각이라는 것에 관심이 많기도 하고 늘 도시재생을 주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만 보더라도 도시재생 이야기가 논의된 지 벌써 20년이 넘은 데다가 본격적으로 제도화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도 10년이 훌쩍 넘었다. 개인적으로 도시재생의 목적이 뚜렷한 주거 환경의 개선 없이 벽화를 그린다거나 주차장 몇 대 확보하는 수준에서 그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역사적 가치가 있는 것을 보존하는 것과 구태의연한 것을 방치하는 것은 엄연한 차이가 있다. 세계적인 도시의 행정가라면 개발을 무작정 반대하기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구체적으로 도시재생을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효율과 편의성만을 추구하는 고밀도 중심의 개발은 지양하는 편이다. 이런 개발은 특정 지역에서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정책을 펼쳐야 큰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서울은 훌륭한 역사적 자산, 잘 보존된 자연환경과 도심을 관통하며 흐르는 한강처럼 매력적인 재료가 넘치는 곳이다. 서울이 과거와 미래를 관통하는 메시지가 담긴 감각 있는 도시로 변화되는 걸 보고 싶다. 그래서 이 책을 보며 이미 도시재생을 성공적으로 이끈 외국의 사례나 그밖에 다양한 분야에서 새로운 시도를 선도하는 프로젝트를 보며 아이디어를 얻고 싶었다. 저자의 다양한 경험이 기대했던 것보다 깊게 담기지 않은 것 같아 아쉬웠지만 새로 알게 된 프로젝트와 문화의 변화, 이를 선도하는 공공기관과 민간기업을 알게 된 건 큰 소득이었다. 마침, 오늘 산책길로 정한 한 곳이 창경궁 주변이라 이 책을 가지고 나왔으면 더 좋았을 테지만 큰 판형에 400페이지나 되는 걸 들고 산책하기엔 무리였다. 덕분에 오랜만에 지하철 안에서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뉴스를 보며 이런저런 이슈를 챙기는데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을지로 3가를 알리는 음성이었다. 계동에 가려면 여기서 3호선으로 갈아탄 후 안국역에서 내리면 되었지만 그러지 않고 곧바로 4번 출구로 나갔다.


밖으로 나오자 만난 곳은 세운상가 주변으로 재개발이 한창이었다. 재개발 구역에 포함되지 않아 몇 개 남지 않은 공구 상가들이 보였는데 오래전 이 길을 걸으며 봤던 세상은 이제 다시 만날 수 없게 됐음을 실감했다. 한참을 올려다봐야 할 만큼 높게 쳐 놓은 담장을 뚫은 소음이 사방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조금 더 걷자 청계천이 나왔다. 정말 오랜만에 청계천 위 구름다리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조금 늦긴 했지만 아직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한 손에 커피를 들고 천변을 걷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미세먼지가 심해 마스크를 쓴 사람도 적지 않았다. 겨우내 표정 없이 묵묵히 자리를 지켰을 나무는 엷은 녹색을 띤 채 수줍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미소는 어느덧 봄이 왔단 걸 알려 주는 얼굴이었다. 다시 북쪽으로 걸음을 옮기다 보니 횡단보도가 나타났다. 그 앞에 서서 반대편을 응시했다. 시선에 들어온 건 종로였다. 그것은 어렴풋한 기억 속 어딘가 자리 잡고 있던 것들이었다. 비록 처음 보는 간판들이 있었지만, 그조차 종로다운 모습이었다. 오랜만에 들렀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걸 보는 게 이토록 반가운 일이구나 싶었다. 신호를 기다리며 새로 바뀌어야 하는 것과 그렇지 않아야 하는 것은 어떤 기준으로 구분할 수 있는지 생각해 봤다. 그곳에 터를 잡고 생계를 꾸려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이어서 불특정 다수의 사람이 누려야 하는 공공의 혜택도 함께 그려졌다. 어느 쪽에 무게를 두는 것이 현명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단 하나, 확실한 게 있었다. 민간과 공공의 이익을 저울질할 수 있는 행정가는 막강한 권력자란 거였다. 시민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결정이 가능한 일인가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게 됐다. 불가능한 것이라면 권력을 가진 자가 어떤 선택을 하든 우리는 그것의 올바름을 구분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도 들었다. 상념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자 신호등의 색깔이 바뀌었다. 깜빡이는 불빛이 이렇게 채근하는 것만 같았다. 어차피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가던 길이나 가라는 듯했다.


좁게 굽어진 종로의 골목길로 들어갔다. 외국인 관광객이 유난히 많았다. 갈매기살 골목과 익선동은 어느새 외국인에게 더 친숙한 공간이 된 것 같았다. 좁은 골목을 빽빽하게 채운 고깃집이 신기한 듯 연신 사진을 찍어대는 관광객이 신기해 나도 그들을 훔쳐봤다. 걸음을 재촉해 북쪽으로 나아가자 안국역에 이르렀다. 길이 넓어진 탓도 있지만 탁 트인 하늘이 보이자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얼마 전 찾아두었던 독립 서점으로 갔다. 문을 열었는데 꼼짝을 하지 않는다. 지도 앱에는 분명 영업 중이라고 나와 있건만 여느 독립 서점처럼 운영 시간은 뒤죽박죽이다. 별다른 사정이 생겼겠거니 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유독 독립 서점은 영업시간을 지키지 않는 곳이 많다. 그렇지만 이것도 나름의 사정이 있다. 예전에 어떤 인터뷰에서 들은 적이 있다. 독립 서점은 워낙 영세하기 때문에 책을 파는 것만으로 운영 수익을 충족하기 어렵다고 했다. 월세나 내면 다행일 정도라면서. 그래서 대다수는 별도의 직업을 갖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 부득이하게 운영 시간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그동안 헛걸음하며 서운해했던 마음을 녹일 수 있었다. 그들에게도 생계를 꾸려야 할 책임이 있을 텐데 수익이 나지 않는 공간을 지킨다는 건 그 일을 사랑하지 않으면 결코 가능한 게 아니었다. 서점을 열어 준 그 자체만으로 감사한 일이다. 이런 사정을 알게 된 후로는 독립 서점에 들를 때마다 웬만하면 한 권의 책이라도 꼭 구매하려고 한다. 큰 도움은 되지 않겠지만 그들이 도시 곳곳에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준 것에 자그마한 힘이라도 보태고 싶은 마음이다. 언제든 편하게 책을 받아 볼 수 있는 시스템 속에서 살고 있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삭막한 도시가 되지 않기 위해선 지역 곳곳에 문화가 살아 있어야 한다는 걸. 그리고 그런 것은 공공에서 모두 챙길 수 없다는 걸 말이다. 조그맣게 운영되는 서점, 갤러리, 카페 같은 곳은 내가 살고 있는 곳의 정서적 안정감을 가져다준다. 오늘도 독립 서점의 문은 닫혀있었지만 서운하거나 실망하지 않는다. 지금 이 시각, 어딘가에서 서점을 위해 애쓰고 계실 것으로 생각하니 오히려 응원하는 마음이 들었다. 대신 산책 동선에 있는 다음 서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 이르자 빼꼼하게 열린 문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자 서점 사장님이 내게 말을 걸었다. 서점인 건 알고 오신 거죠?, 네. 그럼요. 하하. 짧게 웃으며 답하자 사장님은 편하게 둘러보라는 말과 함께 먼저 와있던 손님들과 대화를 나눈다. 서가를 둘러보며 관심 가는 책을 몇 권 골랐다. 나름의 기준으로 심의를 마치자 손에 남은 건 『알아차림에 대한 알아차림』이었다. 이 책을 들고 목차를 살피는데 사장님이 내게 묻는다. 명상 좋아하세요?, 아··· 좋아하는 것까지는 아니고 관심이 조금 있습니다.라고 답하자 사장님은 양손의 엄지를 치켜들며 아이 같은 미소를 짓는다. 결제를 마친 책을 손에 들고 서점을 나왔다. 뻐근해진 발목을 달래 줄 겸 근처 찻집으로 옮겨 책을 펼쳤다.


나는 명상이라는 것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한다. 머릿속에 떠다니는 생각과 마음에 갇혀 있는 감정들을 정돈하며 나를 찾아가는 시간이라고 멋대로 정의하고 있을 뿐이다. 책의 서문에 이런 말이 나온다. "이 책은 인도 베단타 철학의 핵심 질문인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간결하고도 통찰력 있는 답변이다."* 라며 역자는 말한다. 전철 안에서 복기했던 책의 내용, 청계천 주변과 종로를 걸을 때 떠올랐던 도시에 대한 상념이 다시 떠올랐다. 그것은 내가 세상을 보는 관점이었고 그 안에서 나를 조금 더 알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끝없이 이어진 질문은 허공에 머무를 뿐이었다. 그걸 조금씩 정돈하는 게 명상과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오늘의 산책은 어떤 알아차림을 남길 수 있을까?



*루퍼트 스파이라, 『알아차림에 대한 알아차림』, 퍼블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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