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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ng May 04. 2021

길거리 캐스팅 : 저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date와 data

 베를린에서 학교를 다니던 시절 수강하던 과목 중 Cinematic language/editing/technique이라는 수업이 있었다. 이 수업은 영화 영상에 대한 전반적인 것들을 배우는 수업이었는데, 각자 한 편의 비디오를 찍어오는 것이 파이널 과제였다. 그 당시 나는 비자 문제로 정신이 없었고, 과제 제출 직전까지 캐스팅은 물론이고 주제조차 생각해두지 않은 상태였다. 심지어 영상을 위한 장비조차 제대로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대로 간다면 나는 처참히 망하고 말 거야..

아는 사람이라곤 없는 낯선 땅 베를린에서 도대체 누구를 주제로 찍어야 한단 말인가?

워낙 내성적인 편이라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도 힘들어하는데 길거리 캐스팅만이 답인 걸까?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길거리에서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어 본 적 없는 내가 베를린에서 과연 할 수 있을까?


 내성적이지만 타협은 빠르다.

지금 내성적인 게 문제야? 이대로 가면 낙제를 할 판인데.

큰 결심을 하고 무작정 베를린에서 젊고 멋진 사람들이 많은 지역으로 갔다.

포부는 창대했으나 그 끝은 모른다. 하지만 베를린은 워낙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 약간의 희망을 가졌다. 평소에 지나다니면서 본 사람들 중에 멋있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겉모습 만으로도 그 사람에게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신기한 사람들 말이다.

 

 

 그날도 그런 사람들을 기대하며 돌아다녔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어째 한 명도 없는 거지? 심지어 유동인구 자체가 적었다. 오늘 무슨 날인가? 이렇게 날씨도 좋은데 밖을 안 돌아다닌다고?

그 큰 결심을 하고 나왔는데 성과는 없고 망연자실하고 있던 와중에 곱슬머리에 기타를 매고 지나가던 젊은 남자가 내 앞을 지나갔다.


 아 이거다.


 따라가서 말을 걸어야 하는데 용기가 안 났다. 아 내가 너무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잖아. 플러팅 한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근데 어쩌지 놓치면 안 될 것 같은데. 저 사람이 딱인데. 뭐하는 사람인지 너무 궁금해. 기타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니 아마도 그런 분야일까?

따라갈까 말까 반복하며 가다가 멈춰 서고 가다가 다시 멈춰 서기를 반복하다 결국엔 그를 놓쳤다.

그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잘 됐어. 말 걸기도 민망했는데 인연이 아닌가 보다. 근데 너무 아쉽다. 그래도 다시 만나면 말 걸 수 있을 것 같은데. 해는 점점 져가고 시간은 없었다. 마음이 조급해져 다른 곳으로 이동하던 와중 운명인 것인지 중간에 놓쳤던 그를 골목 구석 슈퍼 앞에서 마주친 것이다.

하지만 막상   앞에 상황이 닥치자 망설이게 됐다. 나는 못하겠다며 친구에게 돌아가자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낯선 사람에게 나를 소개하며 말을  용기가 도저히 나지 않았다. 그러자 친구는

 

 "아니다! 할 수 있다. 그냥 말 걸어보자!"


라고 했고 친구의 응원에 힘입어 슈퍼 앞에서 길을 찾던 그에게 다가가서


 "나 이상한 사람은 아니고 사진 하는 학생이야. 혹시 시간 괜찮으면 내가 너에 대한 영상을 찍어도 될까? 절대 수상한 사람은 아니고 내 SNS 계정 알려줄게."


이미 나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고 부끄러움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러자 그 친구는


 "미안 나 지금 데이트는 안 해."


라고 대답했다.


데이트? 뭔 데이트야..?


순간 어이가 없었지만

 

 "아! 나 지금 너한테 데이트하자고 작업을 거는 게 아니라 과제가 영상을 찍는 건데 네가 너무 멋있어서 말을 건 거야."


라고 민망한 표정을 감추지도 못한 채 대답했다.


그러자 그 친구도 엄청 당황스럽다는 표정을 짓더니


 "아니 Date가 아니라 내가 DATA가 없어서 볼 수가 없어.'


 아.. DATE 말고 DATA..

그냥 나는 제 발이 저린 것이다.

평소에 영어로 의사소통을 할 때 큰 문제가 없던 나는 민망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내가 설마 이거 플러팅 하는 거냐 오해하면 어떡하지 걱정을 했는데 내 귀가 제멋대로 그렇게 해석했던 것이다.


 이래서 사람은 듣고 싶은 대로만 듣나 보다.


 

다큐멘터리 필름 포스터
포스터와 스틸컷

 

 알고 보니 그는 뉴욕에서 현대음악을 전공하는 뮤지션이고 워크샵 때문에 베를린에 온 것이었다.

무엇보다 성격도 좋고 가치관도 참 멋진 친구!

그렇게 나는 베를린에서의 첫 다큐멘터리 필름을 완성했다.



영상은 아래의 링크에서 감상하세요!

https://www.yoongjang.com/vid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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