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BLUE NOTE

선택의 가능성

20120202

by 곽소민

온천욕을 더 좋아한다.


표고 버섯을 더 좋아한다.


가사를 알아들을 수 없는 먼 나라 노래를 더 좋아한다.


세상만물이 운행하는 신비를 직관하는 눈을 더 좋아한다.


악보를 보지 않고 피아노를 치는 것을 더 좋아한다.


시계를 보지 않고 시간을 알아 맞추는 것을 더 좋아한다.


아침에 눈 뜨기 전 코를 먼저 뜨게 하는 밥 냄새를 더 좋아한다.


푹 고아진 냉소를 발견하는 사람을 더 좋아한다.


드라마보다 다큐멘터리를 더 좋아한다.


신문을 읽다가 흥미로운 지구적 사건들을 스크랩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서점이 문을 닫을 시간까지 남아 책을 읽는 것을 더 좋아한다.


만나는 사람의 눈보다 손을 먼저 보는 것을 더 좋아한다.


벚꽃비처럼 휘몰아치며 달려드는 아름다움을 더 좋아한다.


실컷 울어 마음을 맑힌 뒤에 떠지는 깊은 눈빛을 더 좋아한다.


빨래를 하고 건조기에서 꺼낸 따뜻한 빨래를 얼굴에 대고 안고 있는 것을 더 좋아한다.


정오의 명동에 울려 퍼지는 종소리를 가만히 듣는 나뭇가지의 새를 더 좋아한다.


유리창보다 거울을 닦는 것을 더 좋아한다.


물이 차올라 한 바퀴 휘 감은 모래성을 만드는 것을 더 좋아한다.


파티를 여는 것을 더 좋아한다.


잠든 아기의 눈썹을 보는 것을 더 좋아한다.


퍼즐을 천천히 시간을 들여 맞추는 것을 더 좋아한다.


세계지도를 따라 그리는 것을 더 좋아한다.


꽃이 되고 싶은 씨앗의 열망을 더 좋아한다.


복종하고 싶은 위대한 무관심을 더 좋아한다.


우아하고 맵시있는 여인의 성숙한 자태를 더 좋아 한다.


세상의 소리들이 음표가 되어 날아오는 순간을 더 좋아한다.


계산서의 단정적 숫자보다 1과 2 사이의 무수한 숫자들이 덮치는 찰나를 더 좋아한다.


백지 위에 색깔들이 배열되고 충돌되면서 생기는 마음의 파장을 바라보는 일을 좋아한다.


사람들이 어린 날 이야기를 할 때의 표정을 더 좋아한다.


이성으로 비관해도 의지로 낙관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꼬불꼬불한 머리카락을 찾아 뽑아 내는 걸 더 좋아한다.


정돈된 가지런한 눈썹의 사람을 더 좋아한다.


하얗고 보드랍고 따뜻한 것을 더 좋아한다.


다리를 뒤로 들어 올릴 때 뒷 허벅지가 당기는 느낌을 더 좋아한다.


창조의 영감을 주는 열정적 인간들의 광기를 촉발시킨,


좌절됐지만 숭고한 사랑이야기를 더 좋아한다.


편지! 편지를 더 좋아한다.


비가 오는 날의 흙냄새를 맡는 달팽이를 떠올리는 것을 더 좋아한다.


멸치의 내장과 대가리를 느긋하게 발라내는 것을 더 좋아한다.


분노가 숙성되어 발효되는 화학작용을 더 좋아한다.


인간성에 실망해도 인간에 대한 측은지심을 잃지 않는 일을 더 좋아한다.


한숨을 쉬어도 빠져나가지 않는 단단한 기억들에대해서는 체념하는 자세를 더 좋아한다.


우울할 때 무심한듯 던져주는 농담의 살가움을 더 좋아한다.


아무 말없이 불쑥 내미는 사탕 같은 것을 더 좋아한다.


인도 바닥에 금과 껌딱지를 밟지 않고 걷는 것을 더 좋아한다.


바라는 것 없는 선의도 있다고 믿는 마음을 더 좋아한다.


잠들기 전에 눈을 감고 우주의 시작을 생각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배영을 하며 유리 천장에 비친 모습을 보는 것을 더 좋아한다.


세상 모든 사람들의 영혼이 하나로 연결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기꺼이 이해하는 친구를 만나는 것을 더 좋아한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명확한 현존에 대해 느끼는 것을 더 좋아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몰래 수줍은 척, 훔쳐보던 처음의 순간을 더 좋아한다.


네가 좋아하던 것들을 함께 좋아하던 나를 하나씩 버리는 것을 더 좋아한다.


세상에 사람에 마음 다 뺏겨 돌아 돌아 가다 다시 나로 오는 시간의 피로를 더 좋아한다.


이제는 더 이상 그리워죽을 것 같지 않은 것들을 더 좋아한다.




*2012.2월 시수업에서 쉼보르스카의 선택의 가능성들의 스타일을 참고하여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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