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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소민 Jan 05.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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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산책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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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잠식하는 어둠의 핵심 속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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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경계를 너머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는 시간의 피로로 하루가 일생 같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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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보낸 편지에 때 늦은 답을 받은 듯, 무섭고 떨리다. 오늘 수 백통의 답장들을 받았다. 보지 않아도 읽을 수 있었다. 며칠간 보일러가 고장나서 팔, 다리가 차가워졌다. 쥐가 났다. 주인집에서 새로 갈아주었다. 보일러는 귀뚜라미보다 경동 나비엔이 좋다고 했다. 보일러를 고치러 온 아저씨는 교수님 같았다. 왜 계속 화장실에 들어가냐고, 화장실 안에서 음악은 왜 틀어놓느냐고 물었다. 느릿한 목소리지만 명료했다. 청소할 게 있어서라고 거짓말했다. 쥐새끼 만한 목소리였다. 마음을 청소 중이라는 말을 하면 안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화장실에 있는 구멍에서 개미가 나오는 것 같아요. 라고 하니 그래서 나오는 게 아니예요. 라고 하셨다. 토끼가 귀엽네요. 라고 했다. 나비엔에서 나오는 물은 부드러웠다. 바닥도 더 이상 타는 듯 뜨겁지 않았다. 물을 가두는 방식이 다르다고 했다. 그 내용은 녹음해두었다. 궁금할 때 녹취를 풀며 들어봐야지. 하지만 심심할 때 누워서 천천히 설명서를 읽으면 된다. 이불 속에서 몸을 녹이며 일을 했다. 몸이 따뜻해졌지만 얼어있는 마음을 녹이기에 충분치 않았다. 토민이에게 남은 딸기를 모두 주었다. 잘 먹지도 않는 딸기는 왜 만날 사가지고. 나는 방울토마토를 몇 개 먹었다. 귤은 아직 먹지 않았다. 뭘 먹어도 입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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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도 맞아본 사람이 피할 줄을 안다." 그 말은 얼마나 아픈 말인가. 하지만 호되게 맞고 나서 이상하리 만큼 맑아지는 마음. 누구를 원망하기 보다는 오히려 용서하게 되는 마음. 내가 아깝거나 귀하지 않은 마음. 나를 충분히 버리고 타인을 위할 수 있는 마음. 을 우린 맞으면서, 시련 속에서 배우고 또 배운다. 그러니 피할 줄 알아도 피하지 않는 것이겠지.

더 이상 나의 트라우마에 치이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면서 하나씩 낱낱이 분석해보자. 무엇이 진실이었고, 사실이었고, 과장되거나 확대된 것인지. 감성도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분류가 가능하다.

집을 구석구석 치우고, 서랍을 정리한다. 이렇게 제대로 하는 건 일년만이다.

잃어버린 것들은 많지만 나는 나의 삶을 다시 되찾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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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빗어 단정히 묶었다. 어린날의 얼굴이 나왔다. 깨끗하게 닦인 거울. 이대로 사라져도 좋을 만큼, 눈물도 예뻤다. 앞으로 나의 선택이 여자이거나 남자이거나. 어느 쪽이라도 상관 없다. 나는 그저 소녀에서 다시 소녀로 돌아온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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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ke Running 을 위한 몸풀기를 시작.

처음엔 집 앞 건물 주차장을 빙빙 돈 것이 다 였다. 그걸로 좀 아쉬워 공원에 가서 트랙을 10바퀴만 돌자고 계획했다. 하지만 10바퀴를 채우고 나니 그 뒤엔 로봇처럼 자동으로 돌게 되었다. 한 20바퀴 정도는 돌았다. 가볍게 뛰기도 했지만 숨이 많이 차진 않았다. 단지 궁금한게 생겼다.

근데 왜 트랙은 거꾸로 도는 거지? 지구 자전 방향으로 돌면 더 빨리 돌 수 있기 때문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찾았다.


<"육상 선수들 뿐 아니라 인간의 절대 다수는 오른손잡이다. 따라서 코너를 달릴 때 바깥쪽에 오른손과 오른 다리가 있어야 하는 것이 '속도 조절'에 더 유리하다. 이것이 첫 번째 이유.

또 다른 ‘가설’도 존재한다. 심장이 왼쪽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코너를 돌 때 자신의 심장을 안쪽으로 두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조금 더 과학적 이론을 뒷받침하자면 심장이 오른쪽에 있으면, 즉 곡선을 달릴 때 우리의 심장이 바깥쪽에 있으면 밖으로 튕겨나가려는 힘, 원심력이 더 크게 작용하기 때문에 달리기에 불리하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지구 자전방향과 같기 때문에 반시계 방향으로 인간은 달린다고 분석한 학자도 있다. 믿거나 말거나.

다만 실제로 육상 역사에서 이 규정에 대한 논란이 일었던 건 사실이다. 1896년 1회 아테네올림픽은 육상 트랙을 시계 방향으로 돌도록 했다. 물론 육상 선수들의 거센 반발이 있었고, 그 결과 1913년 세계육상연맹에서 공식적으로 향후 ‘왼쪽 팔이 트랙의 안쪽에 위치하는’ 국제 공인 규정을 만들어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아직 이렇다할 불만은 없다. 아직도 전 세계 인류의 절대 다수는 오른손잡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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