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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소민 Feb 08. 2017

유진이 부르는 소리

170207

'유진아 같이 가!!'

라는 말을 들었다.


초등학생들의 하교길, 나는 그들을 등지고 서서, 채 녹지 않은 눈얼음 우면산 언저리를 보던 중이다. 그 말에 등 뒤가 찌르르 울렸다. 감동적이었다.


어조와 어감에 실린 솔직다정함, 단호하고 천진한 마음. 그리고 짧지만 의미 전달이 확실한 한 마디.어떻게 저런 말을 쉽게 할 수 있을까? 아이에게 되묻고 싶었지만. 내가 손에 든 구름 때문에 돌아서면 아이의 순수를 해칠 것 같았다.

가만 생각해보면 여지껏 살면서 숱하게 내가 해온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단지 '순수' 라는 단어 하나로 이해할 수 만은 없었다.


작은 아이의 말 하나에도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닫는 요즘이다. 아이의 외침에 고개를 안 돌릴 '유진이'는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유진이가 아니라서, 돌아보지 않았고 그저 듣고 있었다.


가끔은 빈 거리에서도 누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릴 때가 있어서 뒤를 살며시

돌아볼 때가 있지 않은가?


하지만 아무런 힘도 없는 날이면

바람이라도 이렇게 말해주길 바란다.


'같이 가요.'


언어는 단지 글과 문자로 된 기호가 아니라 혀를 굴려 내뱉어야 의미가 된다.

가끔은 말과 의미의 홍수 속에 마음이 침몰하기도 하고 왜곡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잘 회귀하는 중이다.


가끔은 말을 단순하게 액면 그대로 믿어야 살기 편할 때도 있다. 의미와 가치 판단을 배제하고, 숨겨진 가능성도 두지 말고.

말을 그저 말 그대로 만으로. 그렇지 않으면, 온전히 내 일에 집중해서 살 수가 없을 때도 있다. 나는 우선 내가 해야할 것들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무딘 귀가 필요했다. 그래서 모든 말을 그저 받아드리면 되는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상처를 주기 위한 말이라면 상처를 기꺼이 받고, 관심과 애정을 건내기 위한 말이라면 감사히 받으며. 그들이 왜 그런 말을 내게 하는 지 그 이유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의미가 발화보다 나중에 오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아플 때도 있지만 그것을 견디면, 하느님의 사랑이 내가 사는 우주를 감싸고, 이해는 저절로 되었다.


나는 오늘 아이의 용기가 부러웠다.

그 산뜻한 제안에 유진이는 선뜻 미소를 보였을 수도 있겠지.


무슨 일로 유진이가 그 아이를 두고 먼저 가버렸는지 몰라도. 이유의 정당성보다는 남자 아이의 편에 서서 응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문제가 된다면?


마음 언저리를 서성이는 나무 한 그루가 있다면. 내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기 시작하게 된다면.

첫번째, 나무의 열매는 나무의 것이지 내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두번째, 나는 그저 나무를 멀리서 바라보며 해변을 걷고 싶을 뿐이다.

세번째, 걷다가 예쁜 조개껍데기와 조약돌을 주우면 나무 밑에 놓고 오겠지.

네번째, 밤이면 나무 밑에서 불을 피우고 감자를 굽겠지.

다섯번째, 노래도 부르고 나무의 그림자와 달빛 아래 춤도 추겠지.

그러던 어느날, 나무가 바람이 흔들리는 얼굴로 내 이름을 부른다면, 미소를 준비하고 돌아서 똑바로 걸어갈 용기가 있을까?


그리고, 같이 걸어갈 수 있을까?




가끔, 알 것 같다.

하지만 전부 모를 때가 많다.


우리의 언어와

미래의 말들을.


발화되지 않은 것들을 읽는 자와

경우의 발화를 통합하려는 자.


어렵지 않으면 풀지 않는다.

풀기 위해서 어렵게 말하지 않을 것.


우리는 이 모두이면서

둘 다 아니다.


Nothing 의 우주

우주 속의 No thing


끝이 없는 시간 속에서

새로운 우주로 점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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