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도 방향성이 있을까?
분명 순서대로 또 작가별로 꽂아뒀는데, 몇 번 읽고 빼고 새 책들을 사고 하는 동안 다시 계통 없이 섞여버렸다.
내가 오래 전에 사랑하던 시집들은 다 어디갔지?
학창시절 가장 흠모했던 시인은 '산정묘지'를 쓴 조정권 시인이었다. 도서관에 갔다가 제목이 끌려서 읽고, 시인의 표지사진에서 주는 인상이 오래 남아 다른 시집도 찾아 읽었다. 왜 이 분은 낯설지가 않지? 시 역시도 내가 찾던 세계였다. 거의 종교와도 같은 엄숙함과 완벽. 용돈을 모아, 서점에 가서 시인의 시집을 사와 필사했다.
<비를 바라보는 일곱가지 마음의 형태>
이 시집은 비교적 얇은 시집이었고, 제일 먼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옮겼다. <산정묘지>나 <신성한 숲>을 쓰기 전 시인이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모습이 보이는 작품들이 많았다. 이 시집에서 나는 '백지'...라는 작품을 제일 좋아했다. 그 시는 몇 번을 일기장이나 공책이나 친구에게 주는 편지에 썼던 기억이 난다. 늘 한 글씨 한 글씨 정성을 쏟아서 썼던 것 같다. 그렇게 하고 나면 마음이 깨끗하게 씻기는 느낌이었다.
<산정묘지>
그 시집을 열 때면 감히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높은 시의 경지에...무거운 성당문을 여는 듯, 엄숙한 마음 마저 들었다. 나는 시 한 편이 지닌 위대함이나 스케일에 대해 이 시집으로 공부했다. 후에 조정권 시인의 산정묘지가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출간 되었고, 프랑스의 한 유명 시인이 감동해서 편지를 써보냈다는 일화가 있기도 했다. '높고 고독하고 추운 곳으로 향하는 맑은 정신으로 크게 일깨움을 받았다고' 그 이야기가 나는 무척 기뻤고,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산정묘지>는 시를 쓰던 한 친구와 서로 돌려가면서 시 한 편 한 편에 쪽지를 붙여 감상을 쓰기도 했다. 그 친구는 에밀리 디킨슨을 좋아했는데, 그래서 조정권 시인을 좋아하는 나랑 이야기가 잘 통했다. 그때 소중한 쪽지들이 남겨진 그 시집은 사라졌다. 사라진 연유는 좀 복잡하고, 그 일을 통해 나는 여러가지를 깨우치기도 했다. 바로 오늘도 다시금 그 시집을 떠올리게 하는 일이 하나 있어서 속이 시끄러웠지만, 이내 나는 좋은 글의 소재가 될 스토리 하나를 생각해냈다. 시집은 곧 다시 새로 살 예정이다. 조정권 시인님은... 나의 영원한 깃발일지도 모른다. 멀리서도 보이고, 길을 잃다가도 돌아보면 다시 또 보이는 하늘에 꽂혀 펄럭이는 백기.
조정권 시인은 여전히 좋은 시를 쓰고 계시고, 한시의 느낌이 날 만큼 고즈넉하면서도 깊이 있는 시가 참 좋다.
읽다보면 사념이 없어지고 맑아진다. 그리고... 묵직하고 드넓은 바위에 오래 전 살았던 사람이 물을 적셔서 남긴 글씨같다.
보일 리 없지만 바위 깊숙히 박혀 선명한.
장석남 시인, 오규원 시인, 이성복 시인 등의 시도 좋아했지만 시인의 시 전체가 모두 좋았던 건 조정권 시인의 시집들이었다.
최승희 시인, 최승자 시인, 나희덕 시인, 정끝별 시인의 시도 좋아했다.
그 외에 아주 별개의 의미와 느낌으로,
김소연 시인의 시는 내게 많은 자극을 주었고, 다음, 그 다음, 또 그 다음 시집이 더 좋아졌다. <마음사전>이라는 에세이집은 책이 나오기 전에 어느 웹진에 있던 글이었는데, 하나씩 스크랩해서 집에 있던 프린터로 인쇄를해 어떤 친구 문병 갈 때 들고 가기도 했다. 김소연 선생님은 내 마음 속에 있는 의자들 중 가장 특별한 자리에 계시다.
시원하고 조용한 공기가 있는 그런 자리.
그 후 20살에 한 시콘서트에서 김소연 시인을 봤고, 30살에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수업을 들었다. 그 수업에서 만난 사람들 중 몇몇은 시인으로 등단을 했고, 지금 나의 친구들이 되었다. 김소연 시인 아니 선생님의 수업 중에는 '시에 대한 시'가 있었는데 그 중 부분적 발췌.
'...비트는 심상치 않은 순간의 심장박동수에 맞출 것, 호흡에 맞추지 말 것, 습관적인 호흡은 피할 것...
...시로써 표정을 짓지 말 것, 자세를 취할 것, 견디는 자세일 것, 혹은 홀려서 걸어가는 산책일 것...
...이해한 세계를 보여줄 것, 이해시키려 하지 말 것...
...자기 시를 자기 눈으로 보지 말 것, 쌍생아로 하여금 고치게 할 것...'
그 후로도 간간히 시는 썼지만, 어릴 때 만큼 시만 생각하고 시에 몰두해서 살지는 못했다. 그러기에는 시 말고도 하고싶은 일이 많았다. 나는 내가 행복한 대로 하고 싶은 일들을 찾아가며 살아왔고, 나는 그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 덕분에 다양한 미디어를 활용해 구성을 하고 글을 쓰는 방법을 습득했고, 글쓰기라는 기술로 내 밥벌이를 하게 되었다. 글을 써서 일단 먹고 살 수 있어야 작가라고 불릴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나의 외도나 일탈이 정당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시는 나의 꿈이었고, 꿈이란 건 누구나 결코 포기해서는 안된다. 꿈만이 사람의 몸 속에 피가 돌게 하는 힘이되니까. 신이 인간을 바라고 꿈꾸어 생명을 만들었다는 걸 잊어선 안된다. 될 때까지 할 것. 이라고 나는 우리에게 주문을 건다.
다만 시를 다시 따라 잡으려니 만학도 학생같은 느낌. 나는 다시 홀로 시인학교에 입학해서 유일한 학생으로 스스로를 가르치며 시를 써야겠다고 생각한다.
시를 읽고, 이건 틀렸어 아니야 나빠 하기 전에, 그냥 내가 쓰고 싶은 것들에 대해서만 더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읽는 시집들은 내가 갈 길 옆에 지나는 시대의 풍경이고. 내가 도달할 목적지의 그림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하지만 시를 쓰는 것에 방향성이 정말 있는 걸까?
소설이 목적성을 갖는 걷기나 달리기라면, 시는 행위 그 자체, 혹은 춤이라고 나는 확연히 느끼고 있다. 그래서 소설은 읽다보면 숨이 차오를 때도 있지만 시는 한 편 한 편에 빠지게 된다. 홀린 듯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박수를 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어떨까? 시를 느끼는 수 많은 다른 이들의 생각을 알고싶다.
마음을 낮은 자리에 두고,
"그 분들이 가리키는 손과 침묵하는 혀"의 대표적인 발화를 새겨듣고, 입체적으로 돌려보자.
이러한 생각이 틀리고 맞고 떠나서,
이 영원한 주제에 대해 우린 얼마나
더 깊이 파고들 수 있지?
얼마나 더 많은 시를 쓰면,
너를 알 수 있을까?
수 많은 너를
수 많은 나를
벌집 속의 단물 같은
달아서 써져 버린 꿀들을
우리는 어떻게 채집할 수 있을까?
누가 좋은 벌꿀을 모으는 사람이 될까?
좋은 꽃밭에서 옮겨온
정하고, 당도도 적당한
보통의 좋은 꿀.
깨끗한 병을 마련하자.
오래된 병을 이제 마감하지 말자.
모두 하늘에 바치는 언어가 되게
땅에 뿌리고 바다에 던질 수 있는
모든 언어가 저의 것이 되도록
말이 없는 음성으로
천천히 천천히...
아프지 않게
저를 다독이고
이끌어 주소서.
주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