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22 (수) 15:27
안녕하세요 하나씨. 윤하에요. 편지를 써도 되겠냐고 처음 물어본 뒤로 꽤나 시간이 지나버렸습니다. 사실 구체적인 무언가를 생각하고 이야기를 건넨 게 아니라 첫 말문을 떼기가 더 어려웠어요. 생각의 시작은 되게 단순했거든요. 지난 2월 오랜만에 만난 하나씨가 달라져 있으면서도 또 여전해 반가웠고 좋았고, 헤어지는 길에 그런 하나씨와 몇 년에 한 번 만나 잠깐 따뜻함을 나누고 헤어지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해보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마구잡이로 시작된 이 계획이 어디까지 어떻게 갈지, 우선 한 번 해 보죠.
지금 하나씨가 있는 멕시코 사정은 어떤가요. 하나씨 블로그를 보면서 대충 상황을 유추하고 있긴 하지만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어려운 상황이라는 건 알겠어요. 한 달여 전쯤에는 관광객이 줄어들어 주민들 생활이 힘들다는 이야기 정도였지만 그 후로도 특별한 국가적 조치는 없었다는 걸 보니 모두가 그저 견뎌야 하는 상황이 아닐까 짐작만 해 봅니다. 그곳 주민들도 주민들이지만 말도 통하지 않고 아는 사람이라고는 코스 선생님밖에 없는 상황에서 씩씩하게 매일을 살아내고 있는 하나씨 보면서 늘 감탄하곤 해요. 물론 제가 이런 말 하면 하나씨는 아무것도 아니다, 잃을 게 없어서 그런다며 손사래 치겠지만 정말이라니까요.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며 이뤄내기까지 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어요. 그게 제가 하나씨를 좋아하고 응원하는 이유고요.
참, 메신저로 축하인사 전하긴 했지만 여기서도 한 번 더 축하할게요. 원하던 풀 케이브 코스 무사히 마무리한 것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코로나19 때문에 한국을 떠날 때부터 도착해 교육을 받는 동안까지 줄곧 고생이 많았는데 무사히 마무리되어 정말 다행이에요. 올려주는 사진과 영상만 봐도 놀라운 순간의 연속이던데 이런 것을 꿈꾸고 이뤄내기까지 한 하나씨의 의지에 진심으로 경탄을 보냅니다. 이론에서 실전까지 보기만 해도 숨 막히는 교육 기간 동안 하나씨가 부지런하게 올려주는 글들과 사진을 보면서 어쩐지 저까지 두근대는 기분이었어요. 나의 심장이 향하는 곳을 정확히 알고, 그 심장이 데려가는 곳으로 몸을 기꺼이 이끌고, 심장이 원했던 것을 이뤄나가는 일, 정말 어려운 일이잖아요. 도전하는 하나씨의 하루하루를 보면서 두렵지만 그만큼 새로운 무언가에 저도 도전하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어요. 어디까지나 대리체험이지만요.
두렵지만, 결과는 모르지만 한 번 해본다는 하나씨의 매일이 어쩌면 지구 반대편에 있는 저에게 조금은 무모한 이 편지를 시작하게 만들어준 원동력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사실 저는 요즘 꽤 긴 시간 가벼운 무기력증에 시달리고 있어요. 슬럼프인가 잠깐 생각하기도 했는데 SNS에서 ‘슬럼프는 김연아나 김연경 선수 같은 사람들이나 오는 거지 우리는 그냥 게으른 거’라는 말을 보고 생각을 고쳐 먹었어요. 뭘 해낸 게 있어요 슬럼프죠! 그래도 저를 위한 변명을 조금이나마 해 보자면, 20년 가까운 시간 같은 마음으로 앞만 보고 달려온 사람이 앞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혹은 그 같은 마음이라는 게 어떤 마음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시작되었을 때 겪게 되는 내적 혼란이라는 정도로는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 좋아하는 걸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안전하게 발을 디딜 수 있는 땅이라고 생각했던 곳이 실은 안개에 뒤덮인 허공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의 심정이랄까요. god ‘길’ 노랫말처럼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오늘도 난 걸어가고 있’는, 딱 그런 기분이에요. (그러고 보니 이 노래도 2001년에 나온 노래네요. 세월이란!)
그렇게 모든 게 혼란스러운 와중에 자신의 선택에 확신을 가지고 앞으로 꿋꿋이 나아가고 있는 친구가 곁에 있다는 건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자 용기입니다. 하나씨에게도 하나씨만의 고민과 걱정이 많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고 있는 지금에 위로와 힘을 받는 사람이 분명 저 말고도 많을 거라고 생각해요. 다시 돌아갈 수는 없으니까, 추락하지 않도록 허공에서 계속 팔과 다리를 휘저으면서 제가 진짜로 원하는 것을 찾아가는 동안 하나씨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두런대며 나누고 싶습니다. 지금처럼요. 20년 가까이 글을 썼지만 좀처럼 털어놓지 못하는 제 이야기도 편지라면 조금은 편한 마음으로 털어놓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잘 부탁해요.
인터넷으로 보고 있겠지만 서울은 조금씩 사정이 나아지고 있는 중이에요. 새로운 환자 발생도 하루 10명 안팎으로 내려간 상태고, 다음 달 정도부터는 조심스럽게나마 서서히 일상 정상화 움직임이 시작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코로나19 시작부터 일상을 반납하고 헌신하고 있는 의료진 외 이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많은 분들 덕분이겠죠. 우리 일상이 언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지, 이거야말로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지만 희망과 긍정을 잃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거 없이는 지구 위에 살고 있는 우리 인생이 너무 기니까요. 지긋지긋하게. 부디 건강한 하루를 보냈기를 바라며. 답장 기다릴게요.
2020년 4월의 어느 날, 윤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