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한글 책 같이 읽기
책을 사랑하지만 남들보다 책을 유달리 많이 읽는 것도 아니고, 글을 비평하는 능력도 없다. 모임을 주도하는 편은 아니며, 오히려 대게의 경우 모임에서는 ‘잘 따라주자’는 입장이다. 이런 내가 순수하게 ‘한글 책’을 읽고 싶다는 마음에 일을 저질러 버렸다.
경제학 개론에서 배우게 되는 ‘희소성의 원리'라는게 있다. 어떤 재화의 가치는 절대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희소성'에 따라 달라진다. 한국에서는 언제든 원하기만 하면 책을 읽을 수 있었다. 한 번 읽고 다시 안 읽을 것 같은 책은 집 앞 도서관에서 빌려 읽고, 소장하고 싶은 책이나 두고두고 읽겠다 싶은 책은 인터넷이나 대형서점에가서 구입했다.
대학원때문에 뉴욕으로 유학을 오고나서 상황은 달라졌다. 일단 한글 책을 구하는게 너무 어렵다. 한인 타운에 작지만 알찬 ‘고려서적'이 있긴 하지만, 가격이 한국의 3배 정도로 비싸서 살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인터넷으로 주문할 수도 있지만, 배송비에 가격도 가격이거니와 언제 이사갈지도 모르는 불안정한 입장인데 짐을 늘리는 것도 걱정이다.
여기서 몇 가지 질문이 있을수도 있다. 그러면, E-Book으로 읽으면 어때? 혹은 왜 굳이 한글 책을 읽어? 등등.
첫째로, 난 E-Book으로 책을 집중해서 읽지 못한다. ‘왜?’ 라고 질문하면 딱히 논리적으로 답할 재간은 없지만, 정말로 그렇다. 주변의 지인들에게 물어봐도 책을 사랑하는 사람은 있지만, 전자책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직까지 만나보지 못했다. 단지 전자책의 수준이 아직 일정 기준에 미치지 못한 것 일수도 있으나, 나에게 전자책은 화상 채팅을 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생각이 전해질 수는 있지만, 만지고, 보고, 느낄 수 없는 답답함과 한계가 있다.
둘째로, 왜 한글 책을 읽고 싶은지에 대해서는 하루 종일 불평섞인 투정을 부릴수도 있을 것 같다. 미국에 온후, 처음에는 영어를 공부해야겠다는 의욕에 불타올라 영어 책들을 구입했지만, 모르는 단어도 많고, 행간의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우니 이내 좌절하게 시작했다. 한국에서 가져온 몇 권 안되는 한글 책을 읽자니, ‘한번이라도 더 영어 공부해야지 한글 책 읽을 시간이 어디있어..’라는 생각에 점점 책 읽는 맛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러면서 깨달은 것이 감동을 무의식중에 마음으로 바로 받아들이는 것과, 한 번 머리를 거쳐 받아들이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영어 공부는 영어공부 따로 하되, 그냥 스트레스 받지 말고 읽고 싶은 책은 읽자고 생각을 고쳐먹게 되었다.
다시 책 모임을 시작하게 된 계기로 돌아가보자면, 이 희소성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하다가 ‘십시일반'해보는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친구한테 책을 빌리려면, 친구가 어떤 책이 있는지 알아야 하는데 어떤 방법이 있지? 인터넷을 통해 집도 공유하고, 차도 공유하고 심지어 사람도(?!) 공유하는 시대인데 책을 공유하는 방식은 너무 전통적인 방법에 머물러 있는건 아닐까? 그렇다고 해서 인터넷으로 무작정 사람들이 보유한 책 리스트를 모으기만 해서는, 실제로 상호소통이 일어날것 같지 않고… 그래서 ‘감당할 수 있는 작은 규모의 책 모임’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누군가에게 추천을 받은 컨텐츠는 더 관심을 갖고 보게 되며, 소화해 낼 가능성이 더 많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아무리 구글 검색만 하면 모든 것에 나와 있는 시대라고 해도 대화를 통해 직접 지식과 정보와 잡담을 접하게 되면 더 재밌지 않나?
‘아워북스'모임은, 책과 대화를 통해 양질의 지식과 정보는 물론이거니와 비밀스럽게 덕후적인 감성을 감당할 수 있는 만큼 꼭꼭 씹어 소화시킬 수 있는 그런 모임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조심스레 시작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