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 프로포즈, 그 예측 불가능함에 대하여

프로포즈 대작전 후기글

by 윤호 그리고 보람

Tinder에서 만나 결혼을 약속한 후 태국으로 이민을 계획 중인 커플입니다.

함께 글을 쓰면서 번갈아 가며 올리고 있습니다. 제목의 [윤]은 윤호의 글, [보]는 보람의 글입니다.



+윤호의 프로포즈 대작전 준비 및 실전 편을 보고 새삼 다시 고마웠고 감동받았다. 다만 한줄기 또르르 감동의 눈물 대신 목젖 보이도록 웃어재낀 게 마음에 조금 걸리는데, 그건 정말 순도 100프로의 행복함 때문이었다고 말해주고 싶다...



나는 현실가이기보다는 공상가 타입에 더 가까운 편이다. 일이나 삶에 대해서도 그렇고 관계나 연애에 관련해서도 몇몇 로망이나 판타지를 꿈꾸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키워드와 관련해서 특별한 기대를 품지 않는 두 가지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이벤트와 결혼이다.


인생에서 연애와 사랑에 꽤 큰 비중을 두고 생각하는 나인데도 이상하게 저 두 가지에 대해서는 딱히 별 로망이 없었다. 이벤트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로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슬프게도 그동안 연애하는 상대들에게서 별다른 이벤트를 받아 본 기억이 거의 없고, 그렇다 보니 그건 그냥 로망 속에나 존재하는 거구나 하며 자연스럽게 그에 대한 기대 역시 사라졌다. 결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는 연애의 완성이 결혼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나는 비혼 주의까지는 아니었어도 연애의 무덤이 결혼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조금 더 가까운 편이었다. 이 역시 슬프게도, 연애하는 커플의 경우 롤모델? 혹은 부러움의 대상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나의 롤모델 혹은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 줄 만한 부부를 찾기는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리 부모님이 그랬고, 나의 친구들이 그랬다.


그렇다면 프러포즈란 무엇인가. 이벤트와 결혼의 만남이 바로 프러포즈다. 두 남녀가 연애한다. 신뢰와 사랑이 쌓인 커플이 결혼을 약속한다. 부모님께 서로를 소개하고, 가족들끼리 인사까지 마치면 결혼식장을 잡는다. 그 사이 남자가 여자에게 프러포즈한다. 너무 초치는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나에게 프러포즈란 연애의 무덤으로 가는 길목, 쌍방이 암묵적인 합의하에 펼치는 예측 가능한 이벤트. 딱 그 정도였다.


지금의 남자 친구와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는 따지고 보면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었겠지만, 가장 중요했던 건 이 결혼이 최소한 연애의 무덤이 되진 않을 것 같아서였다. 연애의 완성이라는 느낌보다는 그와 결혼해도 내 일상이 크게 달라지지 않으면서도(무덤으로 들어가지 않으면서도), 지금보단 조금 더 재밌게 살 수도 있겠구나 하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사귄 지 한 달 남짓부터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눴다. 아주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둘 다 우리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애써 경계하고 조심스러워했다. 한 커플이 사귀고 결혼을 하기까지 정해진 시간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지만 고작 한 달 만난 커플이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는 건 운명보단 무모에 더 가깝다고 생각했던 탓이었다.


그와 만난 지 6개월쯤. 우리는 부산에서 함께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내고 있었다. 여행 둘째 날이 크리스마스이브였고 우리는 부산 여행에서 가장 큰 기대를 품었던 문화양곱창엘 갔다. 도대체 왜 코딱지만 한 대한민국 땅에서 서울과 부산의 곱창이 이리도 큰 차이가 나는 것이냐며 한탄과 감탄이 오가는 식사를 마치고 해운대에 위치한 숙소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남자 친구가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회사인 듯 보였다.


“네? 그걸 지금 해달라는 말씀이세요?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고, 전 지금 부산인데요?”


역시 회사라는 곳은 월급을 주는 거 말고는 인생에 도움이 되는 법이 없었다. 남자 친구는 이전에도 종종 휴가를 내거나 여행을 가서도 회사 일을 했던 적이 있었던 탓에 ‘망할 노무 회사, 크리스마스이브에도 한결같이 양심도 없구나.’ 싶었다. 곧 숙소에 도착하니 잠시 후 일을 처리해주겠다며 전화를 끊으려는 남자 친구를 다독이려는 순간, 통화를 마치는 핸드폰에 뜬 세 글자 이름이 보였다.


남XX.


아니 그 이름이 왜 거기서 나와? 전에도 몇 번 본 적 있는 윤호의 친한 친구 이름이었다. 심지어 윤호 회사 팀원들의 이름도 대략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의심할 여지없이 의심스러운 이름의 등장이었다.


“엥? 윤호, 근데 왜 남XX 씨야?”


눈치 없고 해맑은 나의 물음에 남자 친구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동공에선 지진이 일었고 꾹 다문 입술에선 초조함이 묻어났다.


“다 망했어. 그냥 호텔에 먼저 들어가 있어”


평소에 눈치가 없는 편이 아니었음에도 그 통화가 크리스마스 이벤트를 위해서였다고 생각도 못했다. 이벤트인 줄 알았으면 아마 모르는 척했을 텐데… 어쨌든 나도 당황스러움+미안함을 안고 호텔에 들어왔다. 그리곤 나도 윤호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하고 있었다. 잠시 후엔 윤호에게서 문자가 한 통 왔다.


‘내 가방 안에 노트북 앞쪽에 클리어 파일이 하나 있거든? 그거 보면서 기다리고 있어’


편지였다. 그런데 편지의 마지막이 이렇게 끝났다.


‘나와 결혼해줄래?’


그건 크리스마스 이벤트가 아니라 프러포즈였다. 편지를 다 읽었을 때쯤 윤호가 상자를 하나 들고 방엘 들어왔다. 그 상자 안엔 꽃과 반지가 있었고, 그렇게 나는 윤호에게 프러포즈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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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이 상황이 재밌고 신나서 깔깔 웃는 내 앞에서 윤호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자신의 프러포즈는 이로써 다 망했고 이런 프러포즈여서 미안하다고. (심지어 다음날 프러포즈를 준비하면서 찾아봤다던 유튜브 동영상을 보여주면서 윤호는 결국 눈시울을 붉혔다.)


프러포즈를 한 사람의 눈시울만 붉히게 된 시트콤스러운 결말이었지만, 나는 이 프러포즈가 정말이지 마음에 들었다. 조금은 어설펐을 수 있지만, 쌍방의 암묵적 합의 하에 진행되는 예측 가능한 이벤트가 아니어서 좋았고, 진심이 느껴져서 감사했고, 무엇보다 그와 결혼을 약속할 수 있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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