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 me do it again
Tinder에서 만나 결혼을 약속한 후 태국으로 이민을 계획 중인 커플입니다.
함께 글을 쓰면서 번갈아 가며 올리고 있습니다. 제목의 [윤]은 윤호의 글, [보]는 보람의 글입니다.
[위기]
계획대로 우리는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여행을 떠났다. 오랜만에 보람이와 떠난 여행은 재미있었지만 가끔씩 문득 캐리어에 잘 모셔놓은(?) 반지가 떠올라 꽤나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대망의 D-Day 가 다가왔다.
우리는 서면의 문화양곱창에서 저녁식사를 하러 나갔다. 숙소로 돌아올 때 꽃 구매를 도와줬던 친구가 전화를 해주기로 했고, 회사일 핑계를 대면서 먼저 보람이를 방에 올려 보내고 호텔에서 꽃을 받아 반지와 같이 주는 것이 나의 계획이었다. 그래서 반지를 가지고 저녁을 먹으러 나갔는데, 이게 굉장히 신경이 쓰인다. 보람이는 추우면 내 주머니에 손을 넣는 버릇이 있어서 반지 케이스를 패딩 재킷 안쪽에 넣어두었는데, 왠지 모르게 볼록해 보이는 것 같고 티가 나는 것 같았다. 상당히 불편한 마음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는데 우리 옆에 앉은 단골로 보이는 커플의 대화 또한 내 마음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이모, 우리 결혼합니데이."
"아이고, 색시 보니까 니가 복받았네. 언제 하는데?"
"내년에 합니다. 하기 전에 다시 또 올게요"
아니 왜 또 하필 결혼 얘기를 하는가. 당연히 일상적으로 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이 때는 정말이지 별게 다 신경이 쓰였다.
곱창은 맛있었다는 것만 기억나지 사실 고기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던 저녁이었다. 다시 숙소로 돌아가려면 30분 정도 걸렸다. 나는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30분 후에 전화 줘'
여담이지만 나는 이야기를 잘 꾸며내는 편이다. 마음먹고 진지한 척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꽤나 많이 속아 넘어가는 편이라, 오죽하면 어머니도 가끔 내 농담과 진담을 구별하지 못해 진절머리를 치시기도 한다. 내 친구도 능글능글한 성격이어서 통화하는 척하면 잠깐 보람이를 속여서 방으로 올려 보내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네 박윤호입니다."
"준비는 됐어?"
"아 예 지금 부산이에요. 여자 친구랑 놀러 왔어요."
"주차를 이렇게 해놓으면 어떡해요. 빨리 차 빼요!"
"(웃음 꾹)아... 사장님이요?"
"형 근데 손흥민이 멀티골 넣은 거 봤어?"
"아니 지금 크리스마스 이브인데.. 자료를 지금 만들어서 보고해야 된다고요?"
이 말까지 했을 때 보람이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보았다. 성공했다!
"사장님이 시키면 해야지. 어서 가서 노트북 가져온다고 하고 내려가"
"아... 노트북은 가져오긴 했는데... 알겠습니다. 우선 숙소 들어가는 길이니까 들어가서 연락드릴게요."
이 말까지 하고 통화를 종료했는데, 보람이가 걱정스럽게 물어봤다.
"일 생겼어?"
"응 xx(팀원 이름)이 뭐 해달라고 하는데... 난감하네."
그런데 보람이가 미처 꺼지지 않은 내 핸드폰 화면을 보았다.
"그래? 근데 왜 이름이 남xx(친구 이름)이야?"
아뿔싸. 설마 내 핸드폰 화면을 보람이가 볼 것이라는 생각까지는 못했다. 여기까지 오는데 꽤나 철저했다고 생각했는데, 하필 가장 중요한 이 타이밍에 모든 것이 들통날 위기에 쳐했다. 정말이지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어떤 핑계를 대야 할지 모르겠는데, 단 하나는 뚜렷했다. 아, 어떤 핑계를 대도 이건 빠져나가기 어려운 상황이구나... 그래서 정면돌파를 시도했다.
"보람이, 내가 준비한 게 있거든? 그러니까 그냥 모르는 척 방에 먼저 올라가서 5분만 기다리고 있을래?"
해운대가 떠나가라 웃던 보람이의 모습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길거리가 조금만 더 깨끗했어도 데굴데굴 굴렀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절정]
(웃음을 멈추지 않는)보람이를 방에 올려 보낸 후, 호텔 리셉션으로부터 꽃을 수령받았다. 다행히 꽃은 사진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예뻤다. 우선 보람이에게 메시지를 하나 보냈다.
‘내 가방 안에 노트북 앞쪽에 클리어 파일이 하나 있거든? 그거 보면서 기다리고 있어’
클리어 파일에는 원고지에 써온 편지가 있었다. 편지의 끝은 '나와 결혼해줄래?' 였기 때문에, 보람이는 이제 이 모든 소동이 프로포즈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될 것이었다. 그 생각을 하기 시작함과 동시에 나는 엄청나게 긴장했다. 오죽하면 반지 케이스를 꽃 박스 안에 넣어야 하는데 손이 부들부들 떨려서 넣지를 못해 심호흡을 여러 번 해야 할 정도였다. 방에 올라가니 보람이는 밝은 미소와 놀라움이 섞인 표정을 지은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한쪽 무릎을 꿇고 청혼하는 것이 진부한 클리셰라고 생각했었으나, 그 상황이 되어보니 자연스럽게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있는 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 인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할 말을 보람이에게 했다.
나랑 결혼해줄래, 보람아?
[결말]
부족한 점이 많은 나임에도 불구하고, 보람이는 내 청혼을 받아들여줬다.
여자 친구가 청혼을 받아들여주었으니 해피엔딩이지만, 프로포즈 자체는 내 부주의로 인해 우스꽝스럽게 한 것 같아서 늘 아쉬운 마음이다. 보람이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너무 재밌고 감동적인 경험이었다고 말해줘서 많이 위안이 되었지만, 좀 더 멋지고 놀라운 프로포즈를 해 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아쉬운 마음이 한가득이다. 그래서 프로포즈를 떠올리면 보람이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다.
프로포즈를 준비하면서 이 글을 보시는 분들은 조금 더 철저하게 준비하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썼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읊조리게 되는 날을 마주하게 될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