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를 읽고 용기를 얻은 이야기
Tinder에서 만나 결혼을 약속한 후 태국으로 이민을 계획 중인 커플입니다.
함께 글을 쓰면서 번갈아 가며 올리고 있습니다. 제목의 [윤]은 윤호의 글, [보]는 보람의 글입니다.
누군가와 같이 사는 것은 정말이지 어려운 일이다.
나는 대학생 때부터 가족이 아닌 누군가와 같이 살기 시작했다. 내가 다녔던 대학교는 천안 병천에 위치해 있어서 대학생활 내내 기숙사에서 지냈고, 남들처럼 2년간 군대도 다녀왔다. 퇴사 후 갔던 배낭여행의 일정 대부분은 도미토리에서 지냈으며, 워킹홀리데이를 갔을 때는 대다수의 워홀러들이 그렇듯이 낯선 사람들과 하우스쉐어를 하며 지냈다. 대학생이 되기 이전에는 20년 동안 가족들과 살긴 했지만 내 방이 있었기에 나름대로 나만의 라이프스타일을 구축하면서 살았는데, 타인과 공간을 공유하며 산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대학교 기숙사에서 살 때는 그나마 괜찮았다. 나와 내 룸메이트들 대다수가 수업과 과제, 동아리 활동이나 대외활동 덕분에 기숙사에서는 문자 그대로 잠만 자는 경우가 많았다.
그나마 특이하다고 할만한 룸메이트와 지낸 적은 딱 한 번 있었다.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닌데(그의 생각을 들은 적은 없으나 아니라고 믿고 싶다) 우리는 같이 살았던 한 학기 내내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지냈다. 내가 그에게 가장 많이 건냈던 말은 잠들기 직전에 "불 꺼도 돼?"였다. 같이 사는 사람이 시끄럽고 수선스러운 것보다는 조용한 게 낫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었는데 너무 말이 없으니까 같이 방에 있는 시간이 은근히 고역이었어서 가끔은 도서관이나 기숙사 라운지에 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앞으로 내 인생에서 만날 룸메이트(or 하우스메이트)들에 비하면 애교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두 번째 룸메이트(들)는 군대에서 만났다. 한국의 대다수의 남자들이 겪는 일이기에 굳이 유난스럽게 무언가를 더 말하고 싶지는 않다. 심지어 나는 입대 후 상병을 달자마자 바로 분대장을 달 정도의 소위 '풀린 군번'이었기 때문에 평균보다는 편한 군생활을 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막사 내에 혼자만의 공간이 없다는 사실이 가장 힘들었었다. 요즘은 전부 바뀌었는지 모르겠는데, 난 여전히 '침상'을 쓰던 세대였다. 가끔 외국에서 만난 친구들이 "한국 군대는 어때?"라고 내게 물으면 나는 구글에서 '군대 생활관' 등의 키워드로 검색한 후에 "여기서 15명 정도가 같이 살아"라는 말과 함께 사진을 보여준다. 한 번은 사진을 본 일본 여자애가 "그러면 너네 자위하고 싶을 때는 어떻게 해?"라고 되물은 적이 있다. 내 인생에서 들었던 가장 참신한 질문 중 하나였다.
시드니와 토론토에서는 하우스쉐어를 했다. 두 도시 모두 정말이지 집세가 미친 듯이 높아서, 일반적인 워홀러로서는 스튜디오(한국으로 말하면 원룸)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비용이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시드니에서는 호스트 부부를 포함하여 7명(사실 이 정도로 많이 살면 불법이다)이 함께 살았고, 심지어 나는 2인실(?)에서 생활했다. 첫 번째 룸메이트는 깔끔하고 조용해서 상당히 괜찮았는데, 두 번째 룸메이트가 문제였다. 두 번째 룸메이트는 인도에서 요리 유학을 온, 이제 갓 성인이 된 아이였는데 도통 공부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매일 새벽 집에 들어와서 해가 중천에 걸리도록 자는 것 같은데, 그거야 내 알바가 아니었지만 문제는 도통 방을 정리를 안 하는 데다가 아침마다 울리는 알람을 끄지도 못하고 자는 것이었다. 빨래는 늘 침대 한편에 산처럼 쌓여있고, 먹다 남은 음식과 군것질 부스러기는 항상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데, 아침마다 울려대는 알람까지 들으려니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 내 비자가 4개월 정도 남은 시점에 이 친구가 들어와서 싫은 소리를 안 하려고 했는데, 결국 귀국을 1주일 앞둔 시점에 참지 못하고 새벽에 소리를 질렀다.
"Can you please turn your FUCKING alarm off!"
영어로 누군가에게 진심 어린 욕을 해본건 그때가 처음이자 (현재까지는) 마지막이었다. 다행히 그 날 이후 1주일간은 알람은 잘 끄고 자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토론토는 어떤 면에서는 더 최악이었다. 처음에는 회사 선배의 방에 3개월 정도 얹혀서 살다가 방을 빼야 할 시기가 왔는데, 마땅한 방을 구하기 어려워 몰리고 몰린 끝에 덜컥 구한 방이었다. 집주인은 60대 할머니였고, 셰퍼트 3마리와 수시로 드나드는 고양이들이 2~3마리 있는 집이었다. 나와 다른 하우스메이트, 집주인 할머니 셋이 사는데 독방을 얻을 수 있어서 이만하면 시드니보다는 낫겠다 싶어서 계약한 것이 화근이었다. 이 할머니는 정말 개들을 사랑했는데, 사랑만 할 뿐이지 집 관리는 1도 안 하는 사람이었다. 사방에 털이 널리고 먼지가 쌓이고, 개들이 먹던 음식물이 바닥에서 놔뒹굴어도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개들을 위한답시고 늘 동요 같은 노래를 크게 틀어놓았는데, 목재로 만들어진 오래된 집이어서 소리가 여과 없이 내 방으로 들어와서 정말 시끄러웠다. 말을 해도 그때뿐이었고 오히려 나한테 왜 맨날 소리를 낮춰달라고 하냐고 해서 다툰 적도 있었다. 심지어 남자 친구를 데려와 섹스를 한 날도 있었는데, 나와 내 하우스메이트가 집에 있는 것을 알면서도 섹스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랍고 정나미가 떨어져 그 이후로 대화를 거의 하지 않았다. 그 나이에도 성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아름다운 일이지만, 그걸 굳이 광고를 할 필요가 있나 싶었는지 아직도 의문이다. 왜 이사를 다시 하지 않았냐고 물을 수 있을텐데, 내가 그 집에 들어갔을 때가 10월 초순이었다.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토론토에 겨울이 온 이후였다. 토론토의 겨울은 정말 추워서 그 해 겨울에 -30도를 찍은 날도 여러 번 있었고, 눈도 자주 와서( 심지어 내가 있을 때는 4월까지도 눈이 왔다) 겨울에 이사를 하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다. 완전히 타이밍을 잘못 잡은 꼴이었다.
이런 일련의 경험들을 겪고 나니, 내가 보람이를 만나고 결혼을 이야기하면서 처음 든 생각은 '우리는 같이 잘 살 수 있을까?'였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백년해로 하겠습니다, 같은 느낌의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생활 습관과 가치관의 차이에서 오는 간극을 잘 메울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예를 들어 나는 다른 곳은 몰라도 주방은 늘 깨끗했으면 좋겠는데, 방은 정신없이 물건을 쌓아두다가 며칠에 한 번씩 정리하는 스타일이긴 하지만 옷은 잘 걸어놓는 편이다. 하지만 보람이가 내 라이프스타일에 꼭 맞을 수는 없지 않은가? 분명 어떤 부분은 다른 점이 있을 것이고, 언젠가는 '치약 좀 중간부터 짜지 말라고!' 같은 이유로 다툴 수도 있을 것이다(참고로 나는 끝에서부터 짜긴 하지만 어디에서부터 짜도 크게 상관은 없는 편이다). 보람이는 나와 달리 여태까지 늘 가족들과 함께 살았어서, 타인과 살아본 경험이 없어 나름대로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어느 날 책을 한 권 샀다고, 여자 둘이 동거하는 내용인데 관계의 형태를 떠나서 같이 사는 사람들이 보면 참 좋겠다고 말해줘서 나도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처음에는 한국에서도 조금씩 생기고 있는 쉐어하우스에 관한 이야기인가 싶었는데, 아예 생판 남남인 둘이 함께 집을 사고 가정을 꾸리며 산다는 사실에 가벼운 충격을 받았다. 그다음으로 흥미로웠던 부분은 이들이 마치 가족, 또는 부부처럼 다투고 싸우고 화해하는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었다. 내가 누군가와 공간을 공유했던 경험 속에서는 계약 관계 안에서 오는 칼같음과, 최소한 내가 낸 비용만큼의 안락함은 보장받아야 한다는 상황이 더 많았다. 어쩌면 일정 금액을 내고 사는 기숙사나, 집주인과 세입자 또는 세입자와 세입자 사이에는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에서 내가 예상했던 내용 또한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는데, 이 두 작가는 가족이 되는 방법이 단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 몹시 신선했다. 그와 더불어 같은 공간에 살게 되면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갈등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담겨있어 개인적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쩌면 나는 이 책을 통해 누군가와 같이 산다는 것에 대해 약간의 용기를 더 얻은 것 같다. 서로 비슷한 점이 많고 같이 살면 즐거울 것이라고 생각해 살림을 합친 두 여자도 결국에는 상처 받고 싸우는 경험을 한다는 것을 읽고 나니, 나와 보람이 같이 살게 되면 다가올 일들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재확인하게 되니 안도감마저 느껴졌다. 보람이과 같이 지내면 늘 기쁘고 즐거운 일만 일어나지는 않을 텐데, 그때마다 이 책을 떠올리면 조금 차분해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또 하나 재미있었던 사실은, 이 두 작가가 처음에 책을 낼 때 타겟으로 삼았던 독자층은 혼자 사는 20~30대 여성이었는데 출판을 하고 나니 오히려 30~40대 부부들이 이 책을 더 많이 읽고 공감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한 번 더 누군가와 살 용기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