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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호 그리고 보람 Jan 19. 2020

[윤] 말레이시아에서 도둑맞은 이야기

Keep yourself safe

Tinder에서 만나 결혼을 한 커플로, 말레이시아에서 거주 중입니다.
함께 글을 쓰면서 번갈아 가며 올리고 있습니다. 제목의 [윤]은 윤호의 글, [보]는 보람의 글입니다.


이 글은 지랄맞았던 2019년의 말에 생겼던 일로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던 핑계를 담고 있으며,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않아 현재 진행형인 이야기이다. 유쾌하지 않은 이야기이기에 그 흔한 사진 한 장도 없는 글이다.




연말이라 한가로웠던 12월 27일 오전 9시경, 사무실에서 빈둥거리던 내게 보람이가 메세지를 보냈다.


"윤호, 문 열어두고 갔어?"

"응? 무슨 말이야? 문은 닫아두고 갔지."

"문이 열려있는데? 일어나보니까 내 슬리퍼가 현관문에 껴있는 채로 열려있는데 어떻게 된 거야? 문단속 좀 잘 하고 나가"

"무슨 말이야...? 나 확실히 닫고 나왔어. 그리고 아무리 내가 출근길이 정신없기로서니 문에 슬리퍼를 껴놓은 채로 문을 열어둔 채 나올 리가... 없잖아?"


여기까지 말했을 때 우리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팀 매니저께 상황 설명을 하니 어서 집에 가보라고 하셔서 Grab을 타고 황급히 집에 와보니, 보람이는 잔뜩 화가 나 있었다. 내가 출근하면 집에 혼자 남아있는데, 무슨 일 났으면 어떡했을 뻔했냐고 하면서 지금부터라도 문 잘 잠그고 다니라고 부탁해서 알겠다고 했다. 사실 평소에는 집에 보람이가 있으면 따로 문을 잠그고 다니지는 않았다. 어차피 우리가 사는 아파트는 카드키가 없으면 엘레베이터도 타지 못하고, 설사 거주자여서 카드키가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층으로는 갈 수가 없기 때문에 '에이, 설마 무슨 일이 생기겠어' 하는 마음에 문단속을 철저히 하고 다니지는 않았다. 그런데 누가 문까지 열어본 흔적이 있었기 때문에 '앞으로라도 문을 잘 잠그고 다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보람이를 달래며 집을 둘러봤는데, 무언가 느낌이 이상했다.


보람, 네 노트북 어디 갔어?

그 길로 당장 콘도 매니지먼트 사무실로 달려갔더니, 도둑이 들었다고 했는데도 이 사람들 문자 그대로 천하태평이었다. 도난당한 내용에 대해 신고 양식서를 쓰라고 하는데 도대체 한시가 급한 지금 이걸 왜 쓰고 있는지, 무슨 용도인지도 잘 모르겠고(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오피스로부터는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CCTV를 확인하러 가보니 콘도 복도에는 CCTV가 없는데다가 그나마 엘레베이터에 있던 CCTV는 모두 고장이 난 상태(1층과 지하 1층만 작동 중이니, 이거라도 확인해 보겠느냐고 하는데 이게 말이야 막걸리야)라고 해서 아무런 단서를 찾을 수가 없었다.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경찰서에 가서 신고 접수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소파에 앉았는데, 집안을 둘러보니 뭔가 또 느낌이 이상하다.


보람, 내 노트북도 없어졌네.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보람이는 급하게 집안을 더 확인해 보더니 지갑과 태블릿PC도 없어졌음을 깨닫고, 정말이지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신고접수를 받은 경찰서에서 조사를 위해 경찰들이 와서 집안을 둘러보고 갈 때까지.


확인할 수 있는 단서가 없기에, "업데이트되는 상황이 있다면 연락을 주겠다"는 말과 함께 경찰들은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갔다. 망연자실해서 소파에 누워있는 보람이를 보니 마음이 복잡해졌다. 일차적으로는 금전적인 손해(심지어 보람이 노트북은 채 1년도 사용하지 않은, 유튜브 편집을 위해 구매했던 고사양의 게이밍 노트북이었다)도 아까웠는데, 말레이시아에서 컨텐츠 생산에 열을 올리고 있는 보람이에게 고사양의 PC가 없다면 사실상 지금 보람이가 진행하고 있는 일은 대부분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안전하지 못한 곳에서 살고 있다는 느낌 때문에 걱정은 두 배로 증폭되었다. 재밌고 새로운 기회를 찾아서 살자고 말레이시아까지 왔는데, 치안에 관련된 이슈가 반년 사이에 벌써 두 번째 일어났고 이번 일은 사안이 훨씬 심각했다. 사람이 집 안에서 자고 있는데, 거실까지 들어와서 노트북과 지갑을 챙겨서 나가는 대담함을 보여준 도둑에게 한편으로는 경외심마저 들 정도였다. 도둑이 든 사이에 차라리 보람이가 잠들어 있었던 것이 다행이긴 했지만(만약 일어났다면 무슨 일이 났을지 알았겠는가...), 우리의 생활 터전이 위협받는다는 생각 때문에 심란해졌다. 


게다가 이런 일을 당하고 나니, 우리는 계속해서 같은 층의 이웃이나 콘도 내에 있는 사람들을 의심하게 되었다. 시큐리티에게 물어보니 내가 출근하고 다시 집에 돌아올 때까지 우리 층에 외부 사람(ex. 음식 배달, 택배)이 온 적은 없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 집에 들어온 범인은 같은 층에 사는 사람 또는 콘도 내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일하는 사람(ex. 시큐리티, 청소부)이 용의자라는 뜻인데, 이러다 보니 마주치는 사람마다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게 되었다. 나도 안다. 근거 없는 의심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는. 그래서 더욱더 이 상황이 싫었고 나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나와 보람이는 상의 끝에 집주인에게 통보 후 이사를 하기로 결정했다. 



길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몇 년간 외국에서 생활하면서 이런저런 일들을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일을 겪고 나서 보니 상투적이지만 '내 몸은 스스로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가장 크게 들었다. 


사실 도둑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콘도 오피스나 경찰의 일 처리가 굉장히 실망스러웠지만, 사실 내가 애초에 문을 잘 잠그고 나갔으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테니 일차적으로는 내가 나(그리고 보람이)의 안전에 더 신경을 쓰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돌이켜보니 회사 차원에서 "연말에는 각종 범죄가 자주 발생하니 사람이 많은 곳에 갈 때는 신경쓰고, 으슥한 곳에 가는 것을 피하라"라는 메일까지 보낸 적도 있었는데, 그 정도로 '경고'를 해야 할 정도인 말레이시아의 치안에 대해 우리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던 면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런 일이 한 번 일어나니 나와 보람이 삶을 너무 크게 뒤흔들어 놓는다는 것이 가장 타격이 컸다. 보람이는 말레이시아 생활을 결정한 후 컨텐츠를 만들면서 여러 가지 기회를 타진해 보기로 했는데, 이런 일을 겪고 나니 노트북이 없어서 작업도 불가능할뿐더러 정신적으로도 의욕이 떨어져 버리게 되었다(다행히 지금은 어느 정도 회복해서 다시 일하고 있다). 나 역시 회사에 출근해서 일하다가도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보람이가 늘 신경이 쓰이고, 집을 다시 알아보는 과정도 매끄럽지만은 않아서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었다.  다행히 보람이와 나도 어느 정도 회복하고, 어찌어찌 새로운 집도 잘 구했으니 다행이긴 하지만 잃어버린 우리의 시간과 돈은 절대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외국에서 사는 것이 힘든 이유 중의 하나는 무언가 우리 일상에 변화가 찾아왔을 때, 그 무게감이 한국보다 훨씬 크게 느껴져서이지 않을까 싶다. 일상에서의 변수를 줄이고 안정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내 안전은 내가 지켜야 한다는 값비싼 교훈을 배웠다. 


덤으로 문단속도 잘하고 다녀야 한다는 경험도 얻었다. 나이 33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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