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부를 수 없는 감정들
"하고 싶은 걸 해보세요."
"하고 싶은 거요?... 네..."
진료가 끝나고 집에 돌아와 철퍼덕 소파에 드러누웠다. 회사를 나가지 않는 이 시간에 나는 무얼 하고 싶은 걸까. 떠올려 보려고 노력할수록 머리가 하얘졌다. 읽고 싶던 책도, 간간이 즐기던 재즈 음악도 싫었다.
씻기 싫었다. 우연히 본 거울 속의 머리카락은 감지 않은 나날을 알려주었다. 기름진 검은 실들이 군데군데 뭉쳐 있었다. 시선을 아래로 옮기자 다크서클이 얼굴 전체를 뒤덮은 듯한 낯빛이 있었다. 그 모양새가 맘에 들지 않아 고개를 돌렸다. 우연이라도 거울을 본 걸 후회했다. 그동안 잘 피해왔었는데…. 아이를 어린이집으로 등하원시키려면 외출을 해야 했기에, 억지로, 샤워기를 들었다. 샴푸 거품을 머리에 문지르다 멈췄다. 한숨이 깊게 나왔다.
그저 하고 싶은 것 없이, 바라는 것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그것이 나의 '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을까. 휴직 후 계속 이 생활을 이어가는 것은 소망이 실현되었다고 표현해야 할까, 아니면 그저 게으를 뿐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실현이라고 하기엔 아무것도 하지 않은 기간이 너무 길다. 보잘것없게 느껴졌다. 게으르다고 하기엔 나 자신이 초라해졌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게으르다'를 선택했다. 다른 단어는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는 데도 옷방은 아직 여름이었다. 남편이 출근할 때 입을 옷을 찾았다. 긴 팔 티셔츠와 조끼. 붙박이장을 열어 겨울 옷을 정리해 둔 수납함을 꺼냈다. 수납함 지퍼를 열어 켜켜이 쌓여 있는 옷을 들춰보았다. 다른 옷들 사이에 껴 있던 긴 팔 티셔츠와 조끼를 찾아내어 그 둘만 살며시 잡아당겼다. 다른 옷들은 무너지지 않게. 수납함 지퍼를 닫지 않은 채, 다시 수납함이 놓여 있던 붙박이장 안, 그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 순간 가혹한 말들이 쫓아왔다. 대체 겨울 옷은 언제 정리할 건지, 언제까지 게으름을 피울 작정인지.
그 말들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상대할 자신이 없었다. 그 모진 말들을 수납함과 함께 붙박이장에 쑤셔 넣었다. 소용없었다. 방문까지 꼭 닫았지만, 그 문마저 뚫고 와 내 귀에 또렷하게 박혔다.
해야만 하는 것들이 나를 가득 채웠다. 내 마음속에는 하고 싶은 것이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싱크대 위로 쌓여있는 그릇들, 빨래통 속에 섞여있는 옷가지들, 봄이 오기 전에 꺼내놓아야 할 겨울 옷들……. 이미 해야 할 것들로 넘치지만 하지 못하는 내게, 하고 싶은 것을 떠올리는 것은 호사였다. 아내와 엄마로서 해야 할 일의 우선순위를 미뤄두고 나의 재미를 좇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어떤 것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찾아오지 않기에, 재미는 사치라고 스스로 합리화한 것일지도 모른다.
"선생님. 매일 누워 있어요. 하는 거라곤 종일 누워있다가 아이 돌보는 것밖에 없는데... 설거짓거리도 쌓이고, 빨래도 제 때 안 해요."
"무기력한 게 계속 있네요."
"... 무기력한 건가요?"
떠올리지 못했던 단어였다. 내가 '게으름'이라고 불렀던 것을 의사는 '무기력'이라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반대편의 검은 창을 응시하며 그 단어를 입 안에서 굴렸다. 굴릴수록 까끌거렸다. 의심스러웠다. 의심하지 않으면 스스로 게으르다고 판단해 버린 과거의 내가 미울 것만 같았다. 혼자서 마음에 생채기를 냈던 것이 못마땅해지려 했다.
지하철에서부터 집에 도착할 때까지 모래보다 작은 알갱이들이 내 입 안을 할퀴어댔다. 현관문을 열고 집 안에 들어섰다. 머리 위에 뜬 주황 불빛을 받으며 한 손을 신발장에 기댔다. 그리고 힘을 실어 다른 쪽 발에 걸쳐진 신발의 뒤축을 내렸다. 나머지 한 짝마저 벗고 나니 고요함이 찾아왔다. 적막한 회색빛 속에서 의사가 말한 그 단어를 조용히 읊조렸다.
"무기력…."
불을 켜지 않은 채 화장실에 들어갔다. 검은 물체들 사이로 은색빛 수도꼭지를 들어 올렸다. 무심코 고개를 들어 마주친 거울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울 속 두 눈과 나의 두 눈은 같은 순간에 멈춰 있었다. 물소리만이 흐르는 시간을 알려주었다. 그래도 될까, 그 단어를 허락해 줄까,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화장실 밖으로 나오니, 거실 바닥 한가운데에 한 줄기의 기다란 선이 놓여 있었다. 그 선은 식탁의자를 타고 넘어 식탁이 맞대어진 벽을 붙잡고 있었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니 베란다 창을 통해 하얀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무언가 나와 달라 보이는 저 빛. 가만히 보고 있자니 입안에 있던 알갱이들이 녹아 사그라지는 듯했다. 개운해진 입안은 떡진 머리와 여름옷이 가득한 옷장이 주었던 죄책감을 잠시나마 물러나게 했다. 그러자 사그라진 죄책감이 날 다시, 철퍼덕, 소파에 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