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른다고 말할 수밖에

2부. 부를 수 없는 감정들

by 윤휘

"윤휘 씨는 그때 어떤 느낌이었어요?"
"…."

"... 모르겠어요. 기억이 안 나요."



상담 시간.


지난 일을 이야기하면, 상담사는 그때의 감정을 묻는다. 상담사의 질문에 답을 찾으려고 눈동자를 굴렸다. 눈앞에 지나가는 감정의 단어들을 하나하나 짚으며 생각했다. 절망, 절망이라고 하기에는 이 세상에 나 혼자만 힘들다는 듯이 너무 부풀려졌다. 속상함, 속상함으로는 내 기분을 온전히 다 감쌀 수 없었다. 오히려 다른 결의 느낌이었다. 슬픔, 눈물은 계속 흐르는 것 보니 슬픈 것 같기 한데, 프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상담사는 나를 차분하게 바라보았다. 상담사와 나 사이에 고요한 공기가 흘렀다. 이 고요한 공기에 내 목소리를 흘려보내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상담사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텀블러를 집어 들었다. 자주 마시는 듯한 캐모마일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상담사가 텀블러를 책상에 부딪히는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상담사가 내려놓는 텀블러의 바닥 면이 책상에 모두 닿을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내 입도 열리지 않았다.


상담사가 감정의 이름을 하나씩, 천천히 나열해 준다. 나는 오지선다에서 정답을 고르는 학생이 된다. 아마도 그랬으리라 짐작되는 당시의 내 기분을 찍어 본다. 학생 시절, 모르는 문제의 답을 찍으면 매번 틀렸다. 이번에도 틀린 답일 지도 모른다.


누군가 나만이 볼 수 있는 화면에 단어를 띄워주며 '이게 네 기분이야'라고 확실하게 말해주면 좋겠다. 가 알고 있는 감정의 영역이 작은 것인지, 감정의 이름을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감정의 이름은 알지만 그 뜻을 오해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의혹은 제쳐두기로 한다. 그저 뇌가 잠시 지쳐서 기억할 겨를조차 없는 것이라고, 괜찮아지면 명료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달래 본다. 아직은 아니지만.




상담 시간의 침묵은 회사에서도 이어졌다.



"하하하하"

"아, 정말요? 호호"



상사의 시시콜콜한 농담에 팀원들이 웃음을 띠어주었다. 사회적 웃음. 그 웃음조차 짓지 못했다. 상사와 팀원들 사이에 오가는 농담과 이야기는 글자 단위로 쪼개져 머릿속을 긁어댔다.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었다. 어지러움을 느끼기에 주위에 오가는 말을 붙잡을 수 없었다. 그 말들은 오히려 머릿속 소용돌이를 더욱 거칠게 만들었다. 내게 말을 건 팀원들은 멀뚱히 나를 쳐다보다가 입을 다물었다. 아마도 생기 없는 눈과 꾹 다문 입술에 당혹스러웠지.


모여 있던 팀원들은 상사의 농담에서 해방되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조금 전까지 들리던 이야기 소리 대신에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 프린터 출력 소리가 사무실에 울렸다. 진부한 소리들 뒤로하고 나는 자리에 앉을 수 없었다. 책상에 양손 끝을 대고 쏟아지려는 상체를 지탱했다. 손가락은 몸의 무게감을 느낄 수 없었다. 앞으로 기울어질 것만 같은 책상 위에 놓여 있을 뿐이었다. 날 찾아왔던 혼란스러움이 무엇이었는지 해답을 찾느라 머리가 지끈거릴 뿐이었다.


예민한 성격 때문일까. 팀원들 사이에서 함께 웃을 수 없는 내 모습이 안쓰러워서 그랬던 걸까. 누구와도 섞이고 싶지 않으면서도, 그 무리에 껴야만 한다는 압박에 어지러웠던 것일까. 왜 난 그 이유를 찾으려고 하는 걸까. 모르겠다. 알 수 있는 건, 그저 혼자 있고 싶다는 사실이었다. 그저 무리와 떨어져 고립된 채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는 것뿐이었다.




대화를 나누며 나와 상대방의 생각을 나누고 싶지 않았다. 최소한의 사회 연결고리로써 가족과 의사, 상담사만이 대화 상대였다. 회사에서, 회사로 인해 맺은 모든 인연들과 말하기 싫었다. 이제 와서 짐작컨대, 회사의 메아리들을 내가 견디지 못했다. 웃으며 응대했더니 내게만 선을 넘는 상사, 내게 결정을 미루는 또 다른 상사, 회사 내 연이 있다며 갑질하는 업체, 고민을 얘기하면 뻔한 직장 스트레스라며 흘려보내라는 진부한 대답을 내놓는 동료직원들. 이 모든 것이 한 데 섞여 나는 회사 내 어느 곳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높은 산등성이들 속 좁은 골짜기로 세차게 몰아치는 바람에 찢겨나간 빨랫감 같았다. 정신 사납게 바람에 휘둘리다가 나를 잃을 것만 같았다. 나는 파티션과 모니터를 높게 올려 그 누구도 쉽게 찾을 수 없는 고요한 자리를 만들었다. 파티션에 파묻혀 내가 글자를 내뱉지 않으면 메아리조차 없을 테니까.


말로 남긴 장면이 없어서 감정도 기억에 담기지 않았나 보다. 주워 담았어야 할 감정들을 줍지 못한 채, 몸통에 난 커다란 구멍을 모른 척하며 지냈었나 보다. 아마 그때 담을 수 없던 감정은 '고단함'이었을까. 감정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이유는, 어쩌면, 아픔을 만들어낸 그 순간의 나를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떠올리는 것조차 고단하기에. 틀린 답일 수도 있지만. 왠지 틀릴 것 같지만.


대답할 수 있는 건, 아직 모르겠다는 것뿐이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