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가 아닌 기다림

2부. 부를 수 없는 감정들

by 윤휘

검은색 슬랙스로 갈아입었다.

다음 주는 회색 트레이닝복이다.


내게 허락된 바지는 단 두 벌. 옷장 속에 가지런히 걸려 있는 다른 바지들은 쳐다보지 않았다. 쳐다볼 수 없었다. 한쪽 다리를 넣자마자 지난 시간들이 남긴 감정이 한 번에 내 정수리를 마구 내리찍을 것만 같았다. 어쩌면 쫓기는 아침 시간에 고민할 필요 없이 입을 옷이 정해져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사실이 나를 위로해주지는 못했다. 옷방을 나서기 전, 문고리를 잡고 행거에 걸린 옷들 틈 사이로 벽지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길게 내쉰 숨 하나에 바지는 아까보다 더 타이트하게 내 배를 감쌌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돌아온 집. 가장 먼저 할 일은 외출복을 벗고 다시 잠옷 바지로 갈아입는 것이다. 잠옷 바지는 다행히도 날 옥죄지 않았다. "나를 입으면 편하게 있을 수 있어"라는 잠옷 바지의 배려. 그 배려를 낮에도 받고 있다. 이 과한 배려를 언제까지 받고만 있을지 생각하자 목구멍이 유일한 숨 통로를 좁혀왔다. 고개를 좌우로 힘껏 흔들었다. 다행이다. 턱 막힐 것 같았던 느낌이 한 발짝 물러났다. 부엌으로 가 찬 물을 한 잔 들이켰다.


한때, 살을 빼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치료를 받으면서 컨디션이 좋아진 잠깐의 시간에. 운동장에서 달리는 내 모습을 그려 보았다. 처음에는 힘들어하며 달리는 도중에 두 무릎에 손을 짚고 거친 숨을 내쉰다. 2주 차에 들어서자 제법 적응한 것처럼 보인다. 달리는 자세도 제법 안정적이다. 배도 약간 들어간 듯하다. 아직까지, 이 장면이 현실에서 이뤄진 적은 없다.




"지금 의욕이 없으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이상한 게 아닙니다."



위로일까, 진단일까. 의사의 말을 해석하려고 잠시 멈췄다. 아픈 동안 10kg나 불었다. 그런 내 몸을 포기한 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 내가 이상하다고 말했다. 그 말에 의사는 이렇게 답했다.


의욕은 노력하면 생기는 당연한 결과라 생각해 왔다. 하지만 의사는 그것이 내 통제 밖의 일이라고 말했다.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는 그 의욕을 가졌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어떤 이유로 장담할 수 있는 걸까. 오직 나만이 의욕을 통제할 수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의사는 진단이 아니라 내게 위로를 건넨 걸까. 나는, 이상한 걸까.


스스로를 비난하게 하는 이 질병은 끝이 없는,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닷속 저 깊은 곳으로 발목을 슬그머니 끌어당긴다. 다가온 지조차 모른다. 기척 없이 다가온 질병은 심연을 향해 나를 끌고 가고 있다. 의사는 내가 살을 빼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것은 이상한 게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전문가다. 나를 치료해 주려는 의욕이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의 말조차 난 못되게 받아들이려고 한다.


바닷물이 내 코를 간당간당하게 적실 때 뒤늦게 내가 가라앉고 있다는 걸 알아챈다. 허우적대는 손과 발로 가장 가까운 뭍을 찾는다. 뭍이 손끝에 닿자 물에 젖어 무거운 몸을 억지로 끌어본다. 폭신한 고운 모래를 만지다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알갱이들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나를 잡아당기던 것은 얼굴 없이 빼꼼히 나를 쳐다보다가 다음을 기약하며 물속으로 서서히 사라진다.




곱씹어본다. 맴도는 그 말을 해석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면 어떨지 상상해 본다. 의욕이 없다,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하고자 하는 마음이나 욕망이 없다. 나는 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움직이는 것조차 버겁다. 그런 내게 일상에 없던 무언가에 도전하고 싶은 생길 리가 만무하다. 받아들이기로 해본다. 난 나약한 것이 아니다. 아픈 나는 의욕을 가질 여력이 없다. 난 치료가 필요하다. 회복이 필요하다.


일을 멈춘 상태인데도, 하루 종일 집에 있는데도, 불편했다. 꼭 신발에 작은 조약돌 하나가 거치적거리는 듯했다. 뭍의 고운 모래 속에 숨겨져 있던 것이 신발 속에 숨어들어 따라왔나 보다. 새끼발톱보다도 작은 돌이 덜그럭거릴 때마다 내 머리는 세차게 흔들렸다. 일을 대신할 만한 무언가를 찾아야만 했다. 새로운 취미 생활을 한다던가, 아이와 남편에게 따뜻한 끼니를 챙겨준다던가 하는 이런 사소한 미션들. 그저 평범한 하루 일과에 그치지 않을 작은 이 미션들조차, 일궈나갈 수 없었다. 그저 자거나 누워있어야 했다. 내 머리와 내 몸은 각기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휴직, 잠시동안 일을 멈추고 병을 회복하고자 선택한 길이다. 쉬고자 다짐했다. 그 어려운 선택을 했으면서도, 쉬어야 할 날들을 쉬지 않으면서 보냈다. 아직 내 몸은 사무실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내 머리는 아직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라고 지시했다. 몸과 머리에게 알려주려고 한다. 이제는 그만 쉴 때라고. 조금씩, 서두르지 않고. 내 몸과 머리가 원만하게 타협점을 찾을 때까지 기다려려 한다. 비로소 함께 한 곳에 머물 수 있도록. 이 순간만이라도.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