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남편이 조리대로 향했다. 찬장에서 유리컵을 하나 꺼냈다. 남편이 자취할 때부터 쓰던 것이다. 십 년도 더 된 컵. 그와 오랜 시간을 함께 한 컵이 정수기 아래에 놓였다.
또르르르.
유리와 물이 빚어낸 소리가 유난히 청아했다. 컵 안으로 떨어지는 물은 하나의 줄기처럼 보였다. 그래서 물줄기라는 표현을 쓰겠지. 하지만 소리는 그 안에 수많은 방울들이 숨어 있다는 걸 말해주었다. 물방울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있다고.
"오빠, 나 오늘 처음으로 책을 펼쳤어."
"여기까지 오는 데 오래 걸렸네. 무리하지 말고."
남편이 왼손으로 컵을 든 채 나를 향해 등을 돌렸다. 옅은 미소와 함께. 남편의 미소에서 말갛고 노란 꽃이 피어났다. 꽃은 바람이 되어 내 마음으로 훅 들어왔다. 특별하진 않지만 평범하지도 않은 아늑함을 껴안고.
아늑함에 취해서일까, 바짝 올라가 있던 승모근은 찬찬히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언제부터인지 꽉 쥐여있던 주먹은 한 손가락씩 힘이 풀리며 틈을 만들었다. 그리고 곧 다섯 손가락 끝이 지면을 향해 축 늘어졌다.
우리 사이에 놓여있던 식탁을 지나 남편의 옆에 섰다. 고개를 돌려 물을 들이켜는 남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컵 안에 있던 물들이 몇몇 무리를 지어 남편의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경쾌하고 리듬감 있게.
탁, 비워진 물컵은 조리대 위로 맑은 소리를 내며 놓였다. 남편은 소파로 향했다. 나도 가벼워진 발걸음을 따라 소파로 향했다. 풀썩. 소파에 내던진 몸 때문에 가벼운 바람이 일자, 남편의 입가에서 노란 내음이 다시 번졌다. 아마도 물방울들이 노란 향기를 머금고 있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