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그런 날

by 윤휘

십 분이다. 아이가 거실에서 화장실 문 앞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 매일 오후 7시 30분, 아이의 목욕 시간이다. 그리고 이 시간만 되면 매일 같은 실랑이가 벌어진다. 화장실 문 앞에서 능청을 떠는 아이를 바라보는 나, 그런 나를 쳐다보며 소파 위에서 파테르를 하고 있는 아이. 쿠션에 맞댄 볼과 입술이 볼록 튀어나왔다. 변함없이 굴러가는 시간표인데도 딸은 이 시간을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나의 한계를 시험하는 시간으로 여기는 듯했다. 그렇게 생각하자니, 뭔가 마음속에서 출렁댔다. 나는 어른이고, 애는 고작 만 세 살밖에 안 됐어, 라며 진정시켰다. 두 콧구멍을 크게 벌려 내 마음을 상쾌하게 해 줄 공기들을 끌어모았다. 그 공기들이 내 안에서 출렁댔던 탁한 것들을 밀어내길 바랐지만, 나의 숨에 미처 다 담을 수 없었다.



"잘 씻는 사람만 자일리톨 먹을 수 있지! 자일리톨 먹을 사람?"



그렇게 화장실 앞에 아이가 서 있었다. 옷 벗는 것을 도와주려고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앉으니, 아이는 나에게 온몸을 축 늘어뜨려 기댔다. 아이와 내 몸 사이는 오백 원짜리 동전도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아이의 옷을 벗길 수가 없었다. 출렁댔던 그것이 이젠 내 가슴뼈를 뚫고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나오지 마, 너도 어릴 때 씻는 거 싫어했잖아, 라며 또 한 번 자기 최면을 시도했다.


겨우 화장실에 입성했다. 아이의 칫솔에 치약을 짰다. 칫솔을 내밀자 아이는 내 말에 반대로 행동하고자 마음먹은 듯 입술을 말아 입 안으로 굳게 닫았다. 분홍빛이 있어야 할 그 자리에 가로 한 줄만이 남아 있었다. 그 순간, 쏟아졌다. 나와 아이, 그리고 우리가 있던 공간이 모두 흔들릴 만큼 쏟아져 버렸다. 가슴뼈를 타고 오르던 그것이 결국 내 목구멍을 지나 입 밖으로 와락 쏟아졌다.



"야!!!"



우악스러운 소리가 화장실 벽에 달라붙었다가 내 귓가로 돌아왔다. 아이는 치약이 얹어진 칫솔을 오른손에 쥔 채 한껏 동그랗게 치켜뜬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엄마, 그렇게 말하면 내가 기분이 안 좋아. 말한 엄마도 기분이 나빠지고."



내가 했던 말. 아이가 어딘가에서 배워온 "씨"를 재미 삼아 할 때마다 하던 말이다. 대신에 "아이 참, 안되네"라고 말하는 게 좋다고 했었지. '야' 대신에 쓸 수 있는 말은 무엇이었을까. 화장실 바닥을 쾅 내리치던 그 말 대신에 쓸 수 있는 말은 무엇이었을까.



"... 미안해. 엄마가 소리 지른 거, 잘못했어."



흑갈색 언저리의 빛을 담고 있는 동공으로 나를 올려다보던 아이가 미안하다는 나의 말에 눈꺼풀로 동공을 가렸다. 나도 아이를 따라 눈을 찡긋 구부렸다. 아이는 입을 벌려 칫솔을 입에 넣고 손을 앞뒤로 움직였다. 나는 손에 비누를 짜고 몽글몽글 거품을 냈다. 그 거품이 사그라들까 아이의 뒷목부터 등까지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내 손길을 따라 아이의 몸 위로 하얀 길이 그려졌다.




어김없이 몸이 축 늘어진 날이었다. 하루 종일 땅바닥 속의 강한 자력은 발바닥도, 종아리도 아닌 내 어깨를 앞으로 끌어내렸다. 곧 고꾸라져 코를 바닥에 박을 것만 같았던 날이었다. 얼른 '해야 할 일'을 마치고 방으로 들어가 자고 싶었다. 하루를 얼른 밤 속으로 밀어 넣고 싶었다.


그랬다. 처음엔 내 기준에 아이를 구겨 맞추는 것은 아닌 지 염려했다. 내가 시간을 쥐고 있다고 믿었다. 내가 만든 7시 30분에 아이를 올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날, 기력이 다한 나는 그 사실을 알아챌 수 없을 뿐이었다. 아이의 고운 이름 대신에 비난의 의미를 담은 호칭으로 부른 것도 그 때문일 테지.



"적당히면 됩니다. 완벽할 필요 없어요."



문득 스쳐간 활자. 견디지 못했던 것은 내가 짜놓은 시간표가 아니라 나의 기력이었다. 그저 그런 날이었다.


부드러운 비누 거품이 벌게진 나의 얼굴에서 부끄러움을 털어내 주었길 바랐다. 평소보다 힘이 덜 들어간 손으로 아이의 등을 문지르며 닦았다. 물을 끼얹자 거품들이 아이의 몸을 타고 사라졌다. 내 볼의 벌건 기운도 조금씩 식어가는 듯했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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