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을 앞두고 수험생이 되었다. 남편이 벌어다 주는 급여에 의지하여 살아야 하는 수험생. 집에서 공부만 하는 사람. 어찌 보면 백수. 기한은 2027년 12월.
한 손으로 들어도 묵직한 교재들. 다행히 손목이 견뎌내 준다. 가장 먼저 펼치는 교재는 민법. 여전히 어려운 단어와 문장들을 담고 있다. 넌 여전히 한글로 쓰인 한자투성이구나. 그래도 이번엔 너를 씹고 씹어서 이 굴레를 벗어나보려고 해.
의자 등받이에 척추를 늘려 기댄다. 눈높이에 맞게 뻑뻑한 독서대 높이를 조절한다. 그 위에 두툼한 민법을 얹는다. 책이 한쪽으로 기울지 않도록 눌러 둔다. 오른쪽으로는 0.5mm 빨간색, 검은색 볼펜이 있다. 그 옆에는 색깔별 형광펜 여섯 자루, 휘어지는 자, 샤프와 지우개가 각각 하나씩. 독서대 밑에는 옥스퍼드 리갈 패드 하나.
보라색, 하늘색, 연두색, 주황색, 노란색. 목차 제목에 색을 입힌다. 모니터 속에서 멈춰 있던 선생님을 움직인다. 1.4배속. 잡념이 끼어들 틈은 없으면서도, 설명은 따라갈 수 있는 속도.
얼마 만에 '수험생'이라는 타이틀을 가져보는 걸까. 대학 입시, 고시, 취업 준비…. 11년 만이려나. 당분간 다시 벌 수 없는 월급만큼의 강의료를 지불하고 책상 앞에 앉아 듣는 강의. 고개를 끄덕이거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반복 재생한다. 교재 속 글자도 한 자씩 읽어간다. 마침표에서 다시 문장의 처음으로 돌아간다.
활자들이 눈에 들어온다는 사실이 다행이다. 왠지 모르게 회사를 벗어난 것만 같다. 낯설면서도 여유로운 기분과는 달리 시험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나 예전만큼 나를 닦달하지 않기로 해본다. 머리와 가슴 한편에 웅크리고 있는 불안이 활개 치지 않도록 조심히 움직이려 한다.
줄곧 40대는 인생의 전성기라고 생각해 왔다. 전성기를 앞두고 늙은 새내기가 되려는 결정이 마냥 설레지만은 않는다. 그래도, 왠지, 아픈 기억이 서리지 않은 곳에서는 다시 시작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슬렁대며 다가온다.
오랜만이다.
봄바람을 타고 온 소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