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회사를 떠났지만, 내 몸은 아직 기억한다
(미 래) "나 왜 이러고 있는지 안 물어봐?"
(할머니) "뭘 물어봐. 보나 마나 또 혼자 힘들어도 버티고 버티다가 왔겠지."
(미 래) "아니, 나 못 버텼어. 나 도망쳤어, 할머니."
-드라마 <미지의 서울> 중에서-
힘내라는 말이 지긋지긋했다.
힘낼 힘이 있어야 힘을 내지. 지금은 힘을 낼 힘조차 없는데, 왜 계속 힘내라고 하는지. 들을 때마다 배 안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더니 이내 쿡쿡 쑤시며 돌아다녔다. 힘내라고 말을 건네는 모든 사람들에게 제발 좀 그만하라고, 입 좀 다물라고 외치고 싶었다. 뱃속 깊은 곳에 있는 꿈틀거리는 무언가를 세차게 토해내어 보여주고 싶었다. 물론 입술을 달짝일 힘조차 없었다. 걸을 때 쓰려고 남겨둔 기력으로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렸다. 미소인지 조소인지 불분명한 옅은 웃음으로 호의에 응대하고 자리를 뜨는 게 최선이었다.
기력이 다해 쓰러지더라도 세차게 토해내야 했을까. 사람들은 나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겉으로 드러난 표정과 행동으로 짐작할 뿐이다. 그 짐작은 침묵을 빚고, 어색한 침묵을 견디지 못해 사람들은 '힘내', '파이팅'이라는 의미 없는 말을 서둘러 내밀었다.
일은 하고 있었지만 무얼 하고 있는지 몰랐다. 어떤 자료를 찾아야 하고, 어떤 단어를 써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내 손은 키보드 위에 있지만 움직이질 않았다. 움직일 수 없었다. 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다. 정규방송이 끝난 후 날카롭게 '삐─'하고 내뱉는 검은 화면의 텔레비전 같았다.
난 세상 사람들과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실체, 물리적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문득 느껴지는 무(無)의 존재였다. 점심시간에 팀원들과 함께 밥을 먹지 않았다. 사무실 의자를 뒤로 젖히고 누웠다. 물론 잠은 오지 않았다. 혹여 누가 말이라도 걸어올까 담요를 얼굴 끝까지 끌어올렸다.
회사에서 나는 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없어도 팀에는, 회사에는 전혀 타격이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먼저 사라지겠노라고 말할 순 없었다. 이야기하는 순간, 내가 그 팀에 존재했던 이유조차 사라질 것만 같았다.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말해주기 전까지는, 난 사라질 자격조차 없었다.
병원 진료일. 의사에게 말했다.
"회사에만 가면 어깨가 처지고, 목소리가 작아져요. 하루에도 두 번 이상은 '어디 아프냐', '힘내'라는 말을 듣는 것 같아요. 사무실을 탈출하고 싶어요. 회사에서는 무얼 먹어도 소화가 안 돼요. 생리는 불규칙하고, 손가락에서 진물이 나요. 저를 힘들게 했던 상황이나 사람들에게서 벗어났는데도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의사가 답했다.
"사무실이라는 공간 자체가 본인에게 계속 부담이 되는 것 같아요. 스트레스가 발생했던 장소잖아요. 회사에 계속 나갈 수 있겠어요? 잠시 쉬면서 회복하는 시간이 필요해 보여요."
의사의 대답이 나를 흔들었다. 회사가 아직 허락해주지 않았지만, 의사가 써준 진단서를 내밀며 잠시 벗어나겠다고 이야기할 명분이 생겼다. 의사의 권위를 앞세워 내 몸이 원하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두려웠다. 상사나 회사가 아니라, 나 자신이 두려웠다. 과연 내가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버텼다. 의심이 두려움으로 바뀌는 장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두려움을 마주해 볼까 생각했다. 대답은 '아니'였다. 남편은 쉬라고 독려해 주었지만, 그에 대한 대답도 역시 '아니'였다. 회사원이 출근하지 않고 병가로 시간을 때우는 것은 본인의 역할을 버리고 노는 것처럼 들렸다. 지금껏 그래왔듯, 자기 비난은 자그마한 틈새를 비집고 들어왔다. 틈새는 힘없이 벌어져 점점 더 큰 구멍이 되고 만다.
어느 날 아침, 눈 뜨자마자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한 채 깊은숨을 내쉬는 나를 보았다. 그동안의 하루들과 다를 게 없는 아침이었으나, 그날의 느낌은 달랐다. 이대로 가다가는 모래로 쌓인 내 몸이 산산이 부서져 흔적조차 남지 않을 것만 같았다. 나 자신을 살리려던 본능이었을까.
꾹꾹 눌러놨던 본성이 이성을 제치고 나와 소리쳤다. "도망쳐!" 그동안 주변 사람들의 말이 차곡차곡 쌓여왔던 힘 덕분일까. 동물적 감각의 내가 말하는 것을 처음으로 들었다. 그날 밤, 결정했다. 용기를 내보기로. 용기를 내어 도망쳐야만 했다. '용기'와 '도망'이라는 단어가 모순적인 것 같았지만, 이 두 개의 단어를 나란히 써야만 했다. 그래야 나 자신을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은 물러서본다. 그때의 나를 본다.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난 아팠다. 아프다. 아파서 제대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뇌가 잠시 지쳐서 당연하게 할 수 있는 말을 자책감으로 꽁꽁 싸매어 풀어놓지 못한 것이다. 아무도 내게 험담하지 않았지만, 허구의 자책감으로 만들어진 깊은 구멍 속으로 빠져버렸다.
내 마음을, 내 뇌를, 내 몸을 망가뜨린 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는 것, 용기 있는 도망. 그때의 나는 이 선택이 꼭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조차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