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로 일하기 시작했을 무렵, 저는 유류분 제도에 대해 솔직히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인이 남긴 유언의 내용이 분명한데도, 일부 상속인이“유류분을 달라”고 주장하면서 고인의 유언 중 일부를 무효화하는 제도.
그게 과연 민법의 원칙인 사적자치에 부합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신입 변호사 시절에 접한 사건들 중에는 이런 경우도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연락조차 없던 자녀가 부모의 사망 소식을 듣고 유류분을 청구하거나, 수십 년 전 집을 나갔던 부모가 자식의 죽음을 계기로 돌아와 유류분을 요구하는 상황.
정작 부모 곁을 지키며 마지막까지 함께했던 가족 외에도, 평생 얼굴 한 번 비추지 않은 이가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법의 보호를 받는 모습을 보며 ‘유류분 제도가 법감정에 반하는 경우도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언은 그 사람의 마지막 의사 표현입니다. 그 뜻이 고스란히 존중되지 않는 현실이, 당시의 저에겐 참으로 마땅치 않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유언은 생각보다 ‘피상속인의 진의’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실무를 오래 하다 보니, 유언이 항상 고인의 ‘진심’만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유언장이 존재하긴 하지만, 그 배경이 불분명한 경우가 많습니다.
병상에 누워 의사소통이 힘든 부모를 찾아가 “지금이라도 유언을 써야 한다”며 조급하게 유언장 작성을 유도하는 자식.
특정 상속인에게만 유리한 내용을 적은 뒤, 법적 요건만 겨우 갖춰 효력만 유지한 유언장.
이런 문서가 과연 고인의 진정한 뜻일까요?
유언은 민법상 엄격한 요건을 갖춰야 유효하지만, 형식을 지켰다고 해서 모두 정당한 유언이라 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실무에서는 ‘형식적 요건’ 외에도 그 유언이 정말 피상속인의 자유로운 의지에 따른 것이었는가를 중심으로 다툼이 벌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유언이 단지 문서 한 장이 아니라, 삶의 마지막 메시지이기 때문에 그 무게는 법적 요건 이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유사한 사건들을 반복해서 마주하다 보니, 저 역시 유류분 제도를 다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유언의 자유는 중요합니다.
누구에게 재산을 남길지 결정하는 건, 피상속인의 권리이자 마지막 의지 표현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유언이 현실에서 온전히 기능하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형식은 갖췄지만 내용이 왜곡되거나, 특정 상속인의 의도에 따라 작성된 유언장.
그런 유언은 때로, 고인의 뜻이라기보다 또 다른 불공정의 시작이 되기도 합니다.
실제로 제가 수행한 사건 중 하나를 간략히 소개하자면, 투병중이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작성한 유언장이 있었습니다. 내용은 특정 자녀에게 전 재산을 유증하겠다는 것이었지만, 의뢰인이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뵈었을 당시 투병중이던 어머니는 이미 의사소통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저는 병원 기록을 확보하여, 유언장이 작성된 날짜에 피상속인의 의사능력이 결여된 상태임을 입증할 수 있었고, 결국 유언의 효력을 무효화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 증거가 없다면?
설령 유언무효소송에서 패소하더라도, 의뢰인에게는 유류분반환청구소송이라는 마지막 수단이 남아있었고, 저 역시 유류분반환청구를 예비적 청구로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 제도가 있었기에, 억울한 상황에서도 최소한의 상속분을 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던 것입니다.
유언은 고인의 뜻을 담은 마지막 메시지이고, 유류분은 그 뜻이 왜곡되지 않도록 지켜주는 최소한의 장치입니다.
영국,미국과 같이 피상속인이 자신의 의지로 유언장을 작성하는 문화가 자리 잡기 전까지, 지금 우리의 법과 현실 속에서 유류분 제도는 공평한 상속을 위한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는 영국과 미국과 같이 유언장 문화가 자리 잡게 되면, 그 때는 유언의 자유가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이고, 유류분 제도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될 수도 있겠죠.
이윤환 변호사의 이혼상속 상담소 홈페이지에 방문하시면, 이혼상속에 관한 생생할 리얼스토리, 법률정보, 칼럼 등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이윤환 변호사의 이혼상속 상담소 홈페이지 바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