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녀석'과 헤어지기로 했다.
처음으로 각자 다른 도시로 떠난다.
산티아고에서 대판 싸울 때 터질듯했던 심장의 바운스는 정상치로 돌아왔지만 우리는 각자만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 녀석'이 새벽에 나가는 소리도 듣지 못한 채 아주 푹 잤다.
지난밤 새벽녘에 한 인사를 마지막으로 우리는 여행의 반이 될 때 헤어졌다.
사실 '인사'랄 건 없었다.
숙소비와 크리스마스 파티비 정산을 '그 녀석'이 체크아웃 할 때 하는 것으로 정한 대화가 전부였다.
스탭과도 작별 인사를 했다.
사실 '인사'랄 것도 없었다.
숙소비와 크리스마스 파티비 정산이 안 되었다 해서 정산을 한 것이 전부였다.
아~씨.. 정산하고 가기로 했잖아. 정산 내가 했어.라고 '그 녀석'에게 카톡 하며 나는 다음 도시인 발디비아로 떠났다.
발디비아는 1800년대 중반 독일 이민자들이 대거 이주해와 발전된 도시다.
아기자기한 거리, 도시를 흐르는 강, 로컬들이 즐겨 찾는 나무가 풍성한 공원이 있는 발디비아는 유럽 느낌이 물씬 난다.
숙소에서 도시 중앙을 가로지르는 깔레깔레 강까지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들고 걸어가니 중앙 수산시장과 강 위 갑판에 떠있는 바다사자가 반겨준다.
거리도 한적하고 스치는 바람도 기분 좋고 한 달 만에 갖는 혼자만의 시간이 참 좋다.
강 건너 유럽풍 가정집을 개조한 박물관에서 마치 내가 18세기 주택의 주인인 양 상상놀이를 하다가 핸드폰을 확인하니
'아~씨.. 정산하고 가기로 했잖아. 정산 내가 했어'에 대한 답변이 도착해 있었다.
'무슨 소리야 내가 다 정산하고 갔는데'
미간이 서서히 좁혀지며 평화로움을 되찾았던 나의 심장은 바. 바. 바운. 바운. 바운스 바운스.
이게 무슨 소린가. 이중결제됐다는 이야기인가.
설상가상으로 와이파이가 계속 끊겨 와이파이를 찾아 근처 카페를 찾아 들어갔다.
'그 녀석'에게 답장을 보냈지만 답이 없다.
계좌도 없는데 나는 다른 도시에 있는데 어떻게 돈을 받아야 하지?
일단 숙소 이메일 주소를 찾아 분노의 타자로 영작하고 있는데, 누군가 테이블 옆에 서더니 나를 부른다.
"Hi"
반사적으로 고개를 홱 돌려 쳐다봤다.
잔뜩 찌푸린 미간으로 세모가 된 눈으로.
"저기 나 너 호스텔에서 봤어. **호스텔에 숙박하고 있는 거 맞지? 같이 앉아도 될까?"
태어난 이후 제일 못생긴 얼굴로 대답했다.
"아 저기 미안한데 지금 문제가 있어서 대화에 집중을 못 할 것 같아. 미안해"
못생긴 얼굴을 보고 놀랐는지 아니면 못생긴 대답을 듣고 놀랐는지 그는 자리로 가서 앉았다.
영작을 마치고 이메일의 send 버튼을 누르니 심장의 바운스는 잦아들었고 그제서야 옆 테이블의 '그'가 보이기 시작했다.
커피를 들고 그의 자리로 이동했다.
"저기 내가 지금 어떤 상황이냐면 어쩌고저쩌고..."
이후 이 에피소드를 '그 녀석'에게 이야기하니 '그 녀석'이 그랬다.
'오~ 누나 싸가지없네~?'
뭐.. 아무튼,
착한 마르틴은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듣더니 이렇게 이야기했다.
'내가 칠레 계좌가 있으니 내 계좌로 돈을 받아줄 수 있어. 그리고 내 폰 빌려줄 테니 전화해볼래?'
세모 난 내 눈은 동그라미로 바뀌었다.
착한 마르틴은 친절히 번호도 눌러 나에게 건네주었다.
호스텔 주인 '바니'와 연결됐다.
버스회사로 돈을 보낼 테니 여권을 가지고 터미널에 가서 본인이 말한 버스회사 창구에 가면 돈을 건네줄 거라는 이야기였다.
착한 마르틴은 돈과 내 정신을 되찾아주었다.
마르틴은 자전거로 남미를 여행 중이었다.
칠레에서 태어난 후 잠깐 일본에서 살았다가 보스턴 MIT를 졸업했으며 자신의 회사를 1년간 운영했었고,
불어 영어 스페인어 일본어(조금)를 구사할 줄 알고 지금 어느 나라에서 살지 자전거로 여행하며 생각 중이라고 했다.
아. 어느 나라에서 살지 생각 중이라니.
내가 서울에서 살 거냐 부산에서 살 거냐 고민하는 것처럼,
내가 용산구에서 살 거냐 은평구에서 살 거냐 고민하는 것처럼,
마르틴은 뉴욕에서 살 거냐 마드리드에서 살 거냐 칠레 산티아고에서 살 거냐 고민하는 중이라고 했다.
언어 하나 차이로 경험할 수 있는 바운더리가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차이가 나다니.
언어는 중요하다. 단순히 의사소통만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 문화와 감정의 소통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부럽다. 어렸을 때부터 다양한 언어를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는 그런 환경을 갖고 있다는 것은.
마르틴이 내일 뭐 할 거냐고 물었다.
자전거를 빌려 발디비아를 구경할 계획이라고 하니 내일은 자전거 타기를 멈추고 푹 쉬기로 정한 날이라며 본인의 자전거를 빌려주겠다고 했다.
남미 여행은 특별하다.
예상치 못한 도움의 손길들이 제시간에 나에게 도착한다.
마르틴에게도 말했듯이 남미는 유독 내가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내가 특별해 보이나? 남미에 아시안이 별로 없어서 그런가? 내가 좀 바뀌었나?
내가 행복해 보이나? 내가 전보다 많이 웃나? 내가 다가가기 쉽게 만드나? 아니면 내가 먼저 다가가나?
내가 변한 것. 아마 내가 변한 것 같다.
자전거를 타면서 '아 행복해'라는 말이 내 입에서 나왔다.
내가 행복한가 보다.
착한 마르틴은 내가 체크아웃 하는 날 나에게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내 방 문을 두드렸다. 똑똑.
그리고 아주 천천히 꼬옥 감싸는 따뜻한 굿바이 포옹을 해주었다.
그것도 슬로 모션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