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어둑어둑한 시간, 알람이 울리기 시작한다.
며칠 동안 쌓였던 피로가 뼈에서 근육으로 스물스물 기어올라오더니
이제는 온 근육을 다 덮어버렸다.
2층 구석에 있는 나무 테이블에서 땡땡 부운 얼굴로 아침식사를 했다.
거기서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일본어 한국어를 하는 프랑스인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는 할 줄 아는 얘기가 언어 자랑밖에 없나 보다.
페북 댓글에 내용도 없는 이상한 일본어와 한국말을 섞어서 영어로 적는데
무슨 소린 지도 모르겠고 적잖이 짜증 난다.
왜 그런 친구. 못된 건 아닌데 같이 있으면 짜증 나는 친구.
왜 자꾸 말끝마다 '~desu(데스)' 를 붙이니.
한번 농담반 진담반 뭐라 했더니 그다음부터 자제를..
다행히 눈치가 있다.
해는 아직 떠오르기 전이다.
차가운 파란색 필터에 쌓인 아구아 깔리엔떼의 공기는 상쾌하다.
마추픽추행 버스를 기다리는 기다란 줄 끝에 섰다.
투어 크루 중 몇몇 친구들은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서 올라간다고 했다.
며칠 동안 그렇게 걷고선 또 걷는다니!
아구아 깔리엔테에서 마추픽추 입구까지 가는 버스 표는
거리에 비해 무지하게 비싼 편도 12달러, 왕복 24달러지만 우리는 고민 없이 구매했다.
드디어 마추픽추에 도착!
만나기로 한 장소에서 크루들과 조인한다.
걸어온 친구들은 벌써부터 온몸이 땀 범벅.
꽃보다 청춘에서 유희열 이적 윤상이 마추픽추를 보고 눈물을 흘리던 장면이 생각났다.
그리고 어렸을 적 꼭 마추픽추에 가겠다던 나의 결심도 생각났다.
꿈은 이루어진다. (=> 꿈은 이루어진다 - 마추픽추)
픽추는 봉우리란 뜻이다.
마추픽추는 '늙은봉우리' 와이나픽추는 '젊은봉우리'.
젊은봉우리 와이나픽추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늙은봉우리인 마추픽추보다 높고 가파르다.
와이나픽추는 마추픽추를 찍은 사진 뒤에 항상 보이는 뾰족한 산인데 그곳에서 마추픽추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하루에 와이나픽추에 올라갈 수 있는 정원은 제한되어 있고, 입장 시간은 하루 두타임으로 나누어져 있다.
와이나픽추 입장권을 미리 예약해 놓은 우리는 입장 시간에 맞춰 입구에 도착해야 했다.
그래서 크루들과 끝까지 함께하지 못하고 헤어져야 했다.
초등학교 때 처음으로 헤어짐의 슬픔을 알았던 때가 생각난다.
4학년을 마치고 5학년으로 올라갈 때였다.
전화통을 붙잡고 4학년 때 친했던 친구들과 슬픔을 함께 나눴었다.
크루들을 남겨두고 와이나픽추를 향해 떠나는 마음이 그때와 비슷했다.
슬픈 이유 중 하나는 단체사진에 우리가 없다는 것...;;
그노무 단체샷...
한 명씩 한 명씩 우린 이제 간다며 눈가 촉촉하게 인사했지만 투어 중이라 몇몇 친구에게는 인사를 못 했다.
작별 인사를 하지 못한 친구 중 한 명은 잭니콜슨 같은 잭이었다.
마추픽추 입구에서 다들 모여있을 때 잭이 앉아있는 나에게 갑자기 이런 말을 했다.
"Bless you"
?라는 표정을 지으니 잭은 이유를 말해줬다.
"You are funny"
지금까지의 인생(?)을 정리하고 새로 시작하려는 나에게 bless you라는 말은 의미 있게 다가왔다.
그것도 마추픽추 입구에서.
그 이유가 '내가 웃겨서 일지라도.
이유가 '웃겨서'라니. 너무 쿨해. 내 스타일이야.
밑도 끝도 없이 우리의 대화는 "Bless you. You are funny" 가 전부였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있었다.
나는 마추픽추 입구에서 잭이 마추픽추의 영혼을 접신하여 나에게 축복의 말을 내려준 것이라고 믿고 있다.
믿슘미까?
우리 집 앞 북한산 족두리봉 올라가는 길이 세상 제일 가파르다고 알고 있는 나에게
와이나픽추는 그보다 더한 놈이었다. 그래 니가 최고.
게다가 하산하는 길을 잘못 선택해서 그 가파르다는 와이나픽추 등산을 2번 한 것 같다.
정상 찍고 내려왔으나.. 다시 정상 찍고 다시 하산..
그 덕에 새로운 귀여운 친구들도 사귀었지만.
역시 여행에서의 예상치 못한 변수는 항상 그만한 가치가 있다.
힘겨운 등산을 마치고 마추픽추와 마추픽추의 라마들을 구경하다가 아구아 깔리엔떼에 다시 도착했다.
쿠스코로 돌아가는 기차 시간까지는 몇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숙소에 도착해 얼마의 돈을 지불하고 샤워를 마치고 동네를 돌아다니는데
헤어짐의 슬픔과 아쉬움이 무색하게 투어 크루들과 5분에 한 번씩 마주친다.
이 기회를 맞아 내 동생 '그녀석'과 'CH'는 서양인 커플에게 그동안 궁금했던 질문을 한다.
커플에게 '너네 남매 아니냐' 란 질문이라니..
나는 저 질문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어주었다.
투어 크루들과는 쿠스코에 도착하고 나서까지 1시간에 한 번은 마주쳐야 했다.
나중에는 "스토킹 그만해" 란 소리를 해야 할 정도.
그래도 우리 투어 크루는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