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나라로

by 윤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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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이다.

새벽에 일어나 차디찬 물로 고양이 세수를 하고
며칠 동안 같은 옷은 입고 또 입고
먼지 뒤집어쓴 지프에서 쭈구리고 이동하고
코골이 소음으로 밤에 피로를 다 풀지도 못하고
그랬다가
2인실에 체크인하고 뜨끈한 물로 샤워하고 밀린 빨래를 하고
낮잠도 자고 신선한 과일도 먹고 맛있는 커피가 있는 예쁜 카페에서 여유도 부리고
달콤한 젤라또도 먹고 샤랄라 한 원피스도 입고

천국이다.

이 달콤한 천국은 칠레 아타카마.
남미에서 가장 못 사는 나라 볼리비아에서 남미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 칠레로 넘어왔다.

우리가 천국이라고 느끼는 칠레는 일단 예쁘다.
거리도 아이스크림도 커피도 카페도 기념품 숍도 과일가게도 아르마스 광장도 사람들도 돌아다니는 떠돌이 개조차 예쁘다.

하지만 커피도 빵도 피자도 아이스크림도 숙소비도 세탁비도 비싸다.

아타카마에는 사막이 있다.
사막의 계곡은 흡사 달의 표면 같다 하여 투어 이름은 달의 계곡 투어다.
사막에서 별을 보는 별 투어도 있다.
아타카마 사막은 지구 상에서 가장 건조한 곳이란다.
수분케어를 아무리 해도 내 피부와 입술은 견디지 못하고 쩍쩍 갈라진다.
선글라스와 모자 없이 낮에 돌아다니는 것은 불가능하다.
눈과 머리카락이 타버릴 듯 한 날씨다.
모자가 없는 나는 수건으로 머리를 보호했다.
천국... 맞나?


비싼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들고 아르마스 광장에 왔다.
곧 크리스마스라 광장에는 크리스마스트리가 있고 근처 성당에서는 캐럴이 흘러나오고 있다.
하지만 태양은 사막처럼 뜨겁다.
광장 나무 밑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아 여유.

마을 중심인 아르마스 광장은 사람들을 구경하기 가장 좋은 곳이다.

엇? 앨리스네?
볼리비아 호프 투어를 함께했던 앨리스가 지나간다.
'Hey How's it going?'
나는 인사하고 앨리스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잠깐 아주아주 잠깐 눈을 마주친 후 종종걸음으로 도망치듯 사라진다.

볼리비아 호프 투어에서 처음 만나 앨리스가 자신의 이름을 말했을 때,
앨리스의 이름은 평생 잊어버릴 수 없겠다 생각했다.
왜냐하면 정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앨리스 같아서.
원작 삽화가 존 테니얼(John Tenniel) 그림 속의 앨리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말고 볼리비아 호프 앨리스의 캐릭터를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빨간 머리 주근깨 새침데기'
볼리비아 호프 투어 중 머물렀던 마을, 코파카바나 발음이 어려워
코카, 바나나로 불러야 한다는 농담을 했을 때도 앨리스만 안 웃었는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같다는 얘기를 했을 때에도 새침한 표정만 지을 뿐 땅을 쳐다보며 아무 말이 없다.
볼리비아 호프 첫 아침식사 때 옆에 앉았던 한 친구와 간간이 이야기할 뿐
함께 왁자지껄 떠들 때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몇 번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데 작게 왱왱거리는 것이 어디 있는지 거리를 가늠할 수 없는 모깃소리 같다.
어쨌든 앨리스의 표정과 제스처를 볼 때마다 괜히 몽롱해진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현실에 있는 느낌이랄까.
앨리스는 환상과 현실의 교차점 같달까.

앨리스가 골목으로 사라진다.
골목 입구가 무슨 동굴 같다.
기념품을 파는 골목인 것 같다.
엇 예쁘다.
앨리스를 따라 한번 들어가 봤다.
저 끝에 빛이 보인다.
좁은 골목길 양편으로 늘어선 작은 가게들을 지나 골목을 빠져나왔다.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비포장도로가 있다.
공기에 습기 하나 없어 무지하게 가벼워진 흙먼지는
한걸음 옮길 때마다 내 얼굴까지 올라와 달라붙는다.

도로 옆에 노점상들이 주욱 들어서 있다.
몇몇 현지인들뿐.
간단한 영어조차 통하지 않는 노점상의 상인들.
샌드위치 가격은 무지하게 싸지만 왠지 먹고 싶지 않다.

다행히 동굴 입구는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다.
비포장도로를 가로질러 다시 굴로 들어갔다.
천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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