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sns에 올라오는 여행 중 행복한 순간, 감성 사진들, 아름다운 노을, 해변, 여유로운 시간 등등.
물론 그 이면에는 짜증, 화남, 어이없음, 기분 나쁨, 더러움, 재수 없음 역시 있다.
일상처럼.
[기분 나쁨]
칠레 아타카마에서 산티아고로 가야 했다.
그런데 너무 멀었다.
중간에 들를 도시를 찾아 구글맵과 론니플래닛 가이드북을 뒤적이는데,
라세레나라는 이름의 도시 설명이 눈에 들어왔다.
'칠레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알려져 있다. 해안지대는 휴양지며 여름에는 관광객들로 붐빈다'
'음. 중간에 들러서 쉬는 도시'에 걸맞는 군.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었다.
짐을 풀고 화장실에 들렀는데 여행자가 있기에 인사했다.
나를 한번 쓱 보더니 지나친다.
음? 내가 인사한 줄 몰랐나 보다.
엇! 다음 날 또 마주쳤다.
이번엔 어제보다 목소리를 키워서 인사해야지.
내가 인사하는 것을 지켜보더니 그냥 지나간다..
아.. 나 무시당한 것 같아..
'그 녀석'에게 이야기한다.
'여기 우리 말고 중국 사람 옆방에 묵고 있는 것 같아'
[거슬림]
숙소 공용공간에 가니, 어제 그제 본 그 중국인이 '그녀석'과 이야기하고 있다.
한국말로!
아, 한국인이었네.
인사하니 이번엔 받아주는 그녀.
이야기하다가 흥미롭지 않아 나는 슬쩍 대화에서 빠져나왔다.
아.. 그녀는 무척이나 외로웠나 보다.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 크다.
소리에 특히 예민한 난 큰소리가 무지하게 거슬린다.
그것도 공공장소에서.
[화남]
'그녀석'과 동네를 돌아다니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나는 이야기한다.
'아까 걔 있잖아. 내가 말했던 그 중국인이야. 알고 보니 한국인이었네.
어제랑 그제 내가 인사했는데 다 들었는데도 그냥 대꾸도 안 하고 쌩 지나가더라? 완전 기분 나쁨.'
'그녀석' 갑자기 짜증 낸다.
'맘대로 선입견 가지지 말고 남 욕 좀 하고 다니지 마.
왜 그렇게 생각하고 다녀?
아 누나가 어제 중국인 있다 해서 그 사람한테 여기 중국인 머무는 것 같다고 얘기했는데..
그 사람 보고 중국인이라고 말한 꼴이잖아'
이런 씨.. 뭐가 선입견이야. 내가 그렇게 느꼈다는데.
내가 맨날 남 욕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심하게 욕한 것도 아니고!
(씨.. 세상에서 젤 재밌는 게 뒷담환데..)
네가 그 사람 보고 숙소에 중국인 있는 것 같다고 말해서 민망한 거 내 탓하는 거야?
화남 1. 여행이 한 달이나 더 남았는데 이제 '그녀석' 한테는 어떤 부정적인 얘기도 못하겠다는 답답함에 화남.
화남 2. 내 감정 디스에 화남.
갑자기 화가 나기 시작했는데 내가 화나는 진짜 이유는 '그녀석'이 내 감정을 디스 했다는 것.
누구나 부정적인 이야기는 거부감 들기 마련이니까. 그만하라는 얘기 알겠는데.
그냥 하지 말라고 하면 될걸 왜 그런 생각을 하냐고 내 감정 자체를 디스 해?
무시당하면 기분 나쁘고, 말을 못 알아듣는다 생각해서 중국인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내가 네 기분에 맞게 감정 조절까지 해야 할까.
네가 이 세상의 중심이냐? 이런 건방진 놈.
아, 화남 세 번째 추가.
화남 3. 본인의 요구 사항을 전달하는 '그녀석'의 매너가 세련 되지 못함에 화남.
[불쾌감]
곧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
크리스마스 기념으로 뭐라도 하고 싶었다.
혼자 아트마켓이 열리는 아르마스 광장을 돌아다니다가 노천 네일아트숍을 발견했다.
레드와 골드를 골라 두 가지 컬러를 조합하기로 했다.
네일아티스트 외 두 명이 더 있었는데, 한 명은 20대 초반 어시스트, 한 명은 그냥 친한 친구 사이인가 보다.
네일을 받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남자친구는 왜 같이 안 왔냐, 칠레 남자들은 어떠냐, 잘생긴 남자들은 좀 봤냐 물어보는데 분위기가 좀 이상하다.
네일아티스트가 스페인어로 뭐라 하면 둘이서 낄낄대고 웃고 뭐라고 얘기했는지 말해달라 하면 알려주지 않는다.
네일아티스트는 무표정으로 입꼬리만 올라가 있는데,
말은 통하지 않아도 아. 이런 게 인종차별이구나. 느껴진다.
계속 웃으며 대꾸하고 반응해주면 심해질 것 같아 무표정으로 그러지 말라고 하니 잠잠해지는 듯하다가 다시 시작이다.
네일아티스트와 어시스트는 흑인이었는데, 아프리카에서 왔다고 한다.
둘 다 인종차별을 좀 당했나 보다.
그래서 살짝 가해자가 되고 싶었나 보다.
어느 정도 그들의 심정은 이해 가지만 그 감정을 표출하는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다. 불쾌하다.
[황당함]
라세레나의 호스텔 사장님은 눈빛이 이글거리는 사람이었다.
과도할 정도로 이글거려서 조금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저 정도로 열성적이라면 숙소는 관리가 잘 되겠다 싶었다.
우리가 도착하자 룸이 준비될 때까지 우리에게 이것저것 물어본다.
남북 분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주 많이 더 피곤해졌다.
대화가 지나치게 열성적인 만큼 대화 없이 가만히 있을 때는 그 쎄한 분위기와 정적이 무서울 정도다.
사장님은 항상 조그마한 마당 건너편 사무실에서 컴퓨터로 열심히 일을 했는데
일할 때 짜증이 퐉- 섞인 미간의 주름과 공격적인 눈빛이
눈을 마주치고 인사할 때면 이글거리는 눈빛과 부자연스러운 미소로 변했다.
그 섬뜩함이란.
인종차별(?)을 당한 그날도 나의 크리스마스 특집 네일아트를 자랑하니
지나친 미소와 함께 '와우!!' 크게 외친 후 사장님은 다시 포커페이스.
라세레나에서 산티아고까지 야간버스를 타기로 했다.
야간 버스 시간은 자정을 넘긴 시각.
버스 시간까지 숙소 공용공간을 이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후 빈둥거리고 있었다.
체크아웃 후 '그녀석'은 어제 남긴 스테이크용 고기를 먹어야겠다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주방 안에서 갑자기 큰소리가 났다.
사장님이 '체크아웃 하고 부엌 쓰면 안 돼!' 'DON'T!! NO!!!!' 하고 소리를 지른 것이다.
'그녀석'은 엄청나게 당황했다.
'난 이제 소리를 지를 것이다'라는 어떠한 경고도 없이,
사장님은 갑자기 나타나서 소리를 빽- 지른 것이다.
그 무서운 눈을 하고는, 굉장히 강력한 명령조로.
그리고는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
무슨 지킬 앤 하이드도 아니고.
호스텔을 나서는 '그녀석'은 호스텔 사장에게 엄청나게 충격을 받은 듯하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고는 기분 나빠서 계속 툴툴거린다.
왠지 어제와 상황이 바뀐 듯하다.
그러면서 나는 툴툴거리는 '그녀석'에게 이렇게 말하고야 말았다.
'야 이제 그만해. 남 욕 좀 하지 마'
너도 어제 나한테 이랬지? 어디 한번 당해봐라. 이런 치졸한 마음.
나와 '그녀석' 나이 차이가 9살이라 하면 사람들은 말한다.
'동생이랑 9살 차이면 절대 싸울 일 없겠어요'
'(개뿔) 내 참을성과 정신연령은 9년 전으로 퇴화되던데요'
여행에도 짜증, 화남, 어이없음, 기분 나쁨, 더러움, 재수 없음 그리고 치졸함이 있다.
일상처럼.